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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비둘기 Nov 03. 2022

런던 (3)

여행의 시작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직접 가 본 런던도 나의 상상과 같지 않았다.


해리 포터와도 달랐고(해리 포터 시리즈의 배경은 애초에 런던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봐 왔던 많은 영상물이나 책과도 달랐다. 런던은 그렇게 영국적이지 않았다. 길에 보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지인 같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당시 내 머릿속의 '영국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언더그라운드에서 설치류 친구들과 함께 지하철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저 막연한 환상이었다. 그랬던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여행은 즐거웠다. 아름다운 세인트 폴 대성당과 누구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국공립 미술관, 갤러리들은 축복이었다. 나중에 파리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입장료로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새삼 런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셔널 갤러리나 테이트 모던은 아마 오십 번쯤 가야 좀 질릴 것 같다.

웨스트엔드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쌍무지개를 봤다. 빌리 엘리어트 티켓을 사러 갔을 때였다. 아니다, 2012년에 두 번째로 갔을 때였던가? 잘 모르겠다. 기억이 모두 엉킨 것 같다. 어쨌든 웨스트엔드에서 쌍무지개를 보았다. 조그맣고 희미했지만 예뻤다.

외국, 그것도 영국에서 처음으로 보는 뮤지컬로 빌리 엘리어트를 고른 건 실수였다. 당시 내 영어실력은 형편없었고 더군다나 미국 영어에 익숙했기 때문에 영국 영어의 듣기 능력은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 도시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이 심한 사투리를 쓰는 뮤지컬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제이미 벨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도 보지 않고 간 것이어서 내용도 잘 몰랐다. 남자아이가 발레를 한다는 것 말고는. 

전체 내용 중 반도 못 알아들었던 것 같다. 내 옆에는 조그마한 일본인 아주머니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나와 상황이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스톨석에 조르륵 앉아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해 멍한 눈으로, 그렇지만 최대한 즐겨 보려고 애쓰면서 소심하게 무대를 바라보던 아시아 여자들. 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치자 우리 셋도 엉거주춤 일어나 박수를 쳤다. 박수는 열심히 쳤다. 그래도 그쯤은 할 수 있었으니까.

라이온킹을 봤어야 했다.     



배낭여행이었기 때문에 돈이 없었다. 장장 8개월간 커피를 내려 번 돈으로 제법 저축을 하긴 했으나 유럽 여행을 여유 있게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음식밖에 없었다. 대학생의 배낭여행이 대개 그렇듯, 샌드위치로 끼니를 많이 때웠다.

그 와중에도 현지에서 기네스를 마셔보자며 넷이서 펍에 갔다(기네스는 아일랜드 맥주라는 것은 그때 몰랐다). 외국인만 우글거리는 펍의 분위기에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한국에서 마시는 기네스보다 두 배는 독한 것 같았다. 나는 원래도 술이 약한 편이지만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얼굴이 벌개졌다.

언젠가 큰맘 먹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뭘 먹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고 대단찮은 한 끼에 19파운드를 지불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박혀 있다. 당시 환율은 1파운드가 1800원 정도였다.

프레타 망제의 샌드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2012년. 올림픽을 보러 간 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많은 관광객이 더 늘어서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지하철에 와이파이가 생긴 건 좋았다. 출처 나




2년 후 다시 런던에 갔을 때는 함께 간 친구의 사촌이 런던에 살고 있어서, 그 친구를 따라 여기저기 괜찮은 곳에도 갔다. 세련된 부촌의 펍에서 마셨던 과일 칵테일 핌스가 기억난다. 시원한 맛이 좋았다.     


이제는 런던에 아무런 환상이 없다. 꼭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직장을 구해 살아야 한다면 런던을 고르긴 할 것이다(직장이 없어도 된다면 역시 이탈리아다). 그런 느낌이었다. 남한의 젊은이들이 일자리와 문화생활을 위해 서울로 온다면, 유럽의 젊은이들은 런던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미술도, 음악도, 문학도, 유럽의 것들은 런던에 모이는 것 같았다. 파리는 런던보다도 낡아버린 느낌이었고 다른 도시들은 작고 폐쇄적이었다. 명실공히 미국이 세계의 중심인 오늘날, 영어를 쓰는 대도시라는 점이 큰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할 거다. 외지인으로서 유럽에 산다면 런던이 최선의 선택일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영국의 젊은이들은 뉴욕으로 가겠지.

물론 실제로 살아보면 또 다를 것이다. 분명히.     


고작 두 번 관광객으로 방문했을 뿐인 내 머릿속의 런던은 서울과 다르면서도 닮았다.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자면 런던의 과거는 흥미로우나 미래는 흥미롭지 않다. 미래가 궁금한 것은 아시아의 도시들이다. 


언젠가 런던에 또 가게 될까? 한두 번쯤은 다시 갈 것 같기도 하고, 전혀 갈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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