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행자와 외로움 많은 독일 할아버지
독일 할아버지 김정일은 뮌헨의 곳곳을 보여주었다. 맥주가 맛있다는 식당에 데려가 주었고, 슈바인학센을 주문해주었다. 물론 식사 비용은 부담하지 않았다. 한국인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아니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은 돈에 민감한 데 비해 남의 끼니 비용에는 참 관대한 것 같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BMW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그가 한국과 연을 맺게 된 계기는 조금 가물가물하다. 김영식인지 영훈인지 하는 이름의 한국인과 친구였다고 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쩌다 그 사람과 친구가 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부분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어쨌든 그 이후로 스스로 한국 이름을 김정일이라고 붙였다고 했다. 물론 당연히 북한의 그 사람을 의도하고 지은 것이었다.
그의 지갑 속에는 한국인들이 기념품으로 준 천 원 짜리나 오천 원짜리 한화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사진도 제법 많았다. 대부분 우리 같은 이십 대 배낭여행객들인 것 같았다. 아직 어려서 남의 호의를 비교적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그 호의가 필요하기도 한, 누구에게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아시아인 여행자들.
김정일과는 사흘 정도를 함께 보냈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옥토버페스트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가고 싶은 맥주 양조장의 천막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옥토버페스트에 가본 적도 없었고,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으니 알 리가 없었다. 김정일이 천막 앞을 지키던 경비와 말씨름을 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독일어를 전혀 몰랐고 김정일의 영어도 그렇게 유창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렵게 들어가게 해 주고도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는 들어갈 수 없었을 곳에 겨우 들어가게 되었다는 걸, 아주 나중에나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운 좋게 들어간 텐트는 아우구스티너의 천막이었다. 거대하고 높다란 축제용 천막과 길게 늘어선 목재 테이블, 목재 벤치들.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 불그레해진 얼굴로 나무 탁자에 올라가 춤을 추는 사람들과 전통의상을 입고 1리터들이 맥주잔 수십 개를 나르는 건장한 백인 아주머니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들이 맥주를 마시고 떠드는 장면과 꼭 닮은 풍경이었다.
맥주잔은 너무 무거워서 한 손으로는 들 수도 없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 무거운 잔들을 수십 개씩 들고 다녔는지 아직도 수수께끼다. 내 목표는 한 잔을 다 마시는 거였다. 1리터를 다 마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다 마셨었나? 기억이 안 난다.
우리 일행 옆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남자아이들이 앉았다. 주위는 음악 소리와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고, 우리의 영어 실력도 변변찮아서 아주 매끄럽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겠지만 어쨌든 술과 분위기에 취해 즐거웠다. 알코올 기운이 한껏 올랐을 때는 그들과 함께 춤도 추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남녀가 둘이 손을 맞잡고 추는 춤이었다. 로맨틱한 건 아니고 흥겨운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춤이라기에도 우스울 씰룩거림 정도였겠지만. 재미있었다.
김정일은 우리를 BMW 박물관에도 데려가 주었다. 그가 전 직원이었기 때문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본인은 박물관을 구경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우리는 관람을 마친 뒤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BMW 박물관에 그렇게까지 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간 것이었기에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다른 일행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바깥으로 나오니 그는 또 새로운 한국인 관광객들과 마주쳤는지 죄다 낚아서 데려온 참이었다. 어린 자녀 둘과 부모 둘로 구성된 가족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홉 명이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상냥한 가족들이었다.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에 살고 있었고, 독일에는 놀러 온 것이라 했는데 우리가 이후에 니스에 갈 계획이라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니스로 오면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주었다. 나중에 니스에 갔을 때 그들에게 연락해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단 한 번 식사한 사이라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기도 해서였다. 연락을 해보았으면 더 좋았을는지, 역시 아니었을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끝까지 김정일의 독일 이름을 듣지 못했다. 원래 이름이 뭐냐고 몇 번 물어보았지만 그는 매번 농치듯 김정일이라고만 대꾸했다. 그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농담 같은 거짓말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김정일’을 마냥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베푸는 도움도 우리가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 도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도움을 준다'는 개념이 필요한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분명 우리에게 무언가 주고 있었고 우리도 무언가를 받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르게 진실성이 결여된 느낌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해로울 것은 없었고, 우리가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그가 많은 노력을 쏟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나름의 특별한 기억을 선사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그저 아주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