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은 금세 전화를 받았다. 주저하는 목소리였다. 메시지를 무시해서 그런가? 어쨌든 윤정은 그녀가 전화를 곧장 받았다는 것에 만족했고, 정윤의 목소리에 못내 안도감을 느꼈다. 왜인지는 몰랐다. 다짜고짜 지금 집으로 가도 되냐고 묻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가도 된다는 소리겠지. 윤정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정윤의 집으로 갔다.
“그동안 왜 연락이 안 됐던 거야?”
정윤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내 건데. 내 머리에 달려 있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윤정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어쩔 바를 몰라 하는 정윤에게 냅다 안겼다. 정윤은 어색하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윤정은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되찾을 거야. 내 얼굴. 내 얼굴. 내 얼굴.
정윤의 어깨를 흠뻑 적신 뒤에야 윤정은 울음을 그쳤다. 그녀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 윤정은 힘없이 바닥에 앉아 고개를 돌려 원룸을 돌아보았다.
그 원룸은 윤정의 방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엉망진창인 그의 방과 달리 이곳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고, 책장이 있었으며, 그 책장에는 책도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만화책이 잔뜩 꽂혀 있었다. 윤정은 만화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프레임 없이 매트리스만 놓인 침대 위에는 펭귄 인형 하나, 토끼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고 창문가에는 선인장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식물의 화분이 하나 있었다. 창문은 윤정 방의 그것보다 작았다. 그리고 커다란 미술용 나무 받침대 위에 캔버스가 놓여 있었는데 뭔지 잘 모르겠는 추상화 같은 그림이 있었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물건이 없었다. 예쁜 것이라면 덮어놓고 사들여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윤정의 방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태어나서 진짜 처음 본다, 이렇게 깨끗한 집은.”
정윤이 걸어와 물이 담긴 머그컵을 건넸다.
“어제 청소했거든. 정리해두길 잘했다.”
“있잖아. 그림 볼 수 있어? 나 그림 보고 싶다.”
“그림? 음……그러면.”
그녀는 추상화를 지나쳐 책장 옆으로 가 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은 그림으로 메워진 크고 작은 종이로 가득했다.
“와. 엄청 많다!”
윤정은 그림을 죄다 바닥에 펼쳐 하나하나 구경했다. 정윤도 곁에 앉았다. 풍경이나 정물 그림도 있었지만 사람이 많았다. 주로 예쁜 여자를 예쁘게 그려낸 것이었다. 화보를 그림으로 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림들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윤정이 불쑥 말했다.
“있잖아, 나 한 장 더 그려주면 안 돼?”
“또 그려달라고?”
“안 돼? 언니 그림 너무 이쁘고…나 더 갖고 싶단 말이야. 한 장밖에 없으니깐.”
정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정은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분이 상한 건가? 그럴 만큼 이게 어려운 부탁인가? 한 이십 분이면 하나 뿅 하고 나오는 걸 이미 봤는데, 설마 이제 그리기 싫은 건가? 날? 뿔이 나기 시작한 윤정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정윤이 말했다.
“나도…나도 받고 싶어.”
“어?”
“주기만 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리고 너한테 뭔가 받으면 의미 있을 것 같아.”
“근데 내가 어떻게 해? 난 그림 못 그려!”
“꼭 그림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뭘 해 달라는 거야?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내 입으로 말해야 되냐고!
“나한테 뭘 바라는데? 갑자기 왜 이래?”
그 어떤 남자도 나한테 이런 걸 요구한 적은 없었는데…라고 생각하다가 윤정은 깨달았다. 남자애들한텐 웃어주고, 예쁜 척을 하고, 허벅지를 슬쩍슬쩍 만지고, 입도 맞추고, 잠도 잤지. 아, 그렇구나.
“뭘 바란다기보다는….”
정윤이 우물우물했다. 그녀는 살짝 비스듬한 자세로 윤정을 보고 있었다. 시선은 곧지 않았다. 불안해 보였다. 그러더니 금방 눈을 떨구었고, 따라서 어깨도 조금 처졌다. 금방 허물어질 것 같았다. 윤정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왜인지 산봉우리 벼랑 끝에 쌓여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눈더미가 떠올랐다. 그는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정윤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팔을 잡는 자신의 손아귀 힘에 되레 놀랐다. 윤정은 놀라 파드득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입술을 떼었다. 왜 이렇게 뛰어대는 거야. 입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 생각해 보니 하나 있는 거 같아. 줄 수 있는 거.”
목소리가 낮아졌다.
“언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정윤의 몸이 굳은 것이 느껴졌다. 상대는 잡힌 팔을 빼려고 잡아당겼다. 그 얼굴, 고작 이삼 주 전까지만 해도 윤정의 목 위로 달려 있던 아름다운 얼굴이 붉었다. 윤정은 손아귀에 더 강하게 힘을 주고 당겼다. 정윤의 상체가 와락 끌려왔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한 채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정은 그녀의 얼굴에서 스며 나온 숨이 자신의 코끝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만 같았다. 윤정은 어디인지 모를 깊은 구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다 그만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멀리멀리 떨어졌다. 나는 듯 떨어져 갔다. 더 멀리. 더 깊이.
이제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움직였다. 무엇에 홀린 듯,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긴 듯. 윤정은 제 앞의 그 아름다운 것에 입을 맞추었다.
정윤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귓가를 파고드는 가쁜 숨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자신의 것이었던 얼굴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맞닿는 입술과 혀, 숨소리, 부딪히는 코와 부드러운 입속의 살. 한 시간인지 십 분인지, 그도 아니면 십 초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몸을 떼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윤정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 멍하니 그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정윤이 다시 그의 목을 잡고는 입을 맞대어 왔다. 키스는 서툴렀지만 뜨거웠다. 윤정이 여자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황홀한 기분으로 누워 옷을 추슬러 입는 정윤의 풀어진 머리, 부드러운 팔의 움직임, 제모하지 않은 음부와 살짝 접힌 허리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벗은 몸을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들의 벗은 몸과는 너무나 달랐다. 똑같은 알몸인데도 성우라든가 다른 몇몇의 남자들의 몸이 시끄러웠다면 정윤의 몸은 조용했다. 몹시 조용하고 조심스러워서 어째서인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가? 그게 뭔가 더 야하다고, 윤정은 속으로 종알거렸다.
확실하게 깨달은 점은 얼굴과 달리 정윤의 몸은 윤정과 닮은 점이 어느 한 구석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그려줄게.”
“응?”
정윤이 옷을 다 입고는 몸을 돌려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과 내리깐 눈매를 본 순간, 윤정은 그 언젠가 자신이 거울을 보고 있었던 때와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대신 이번엔 내가 그리고 싶은 사진으로 고를래.”
“정말? 그려줄 거야?”
“저, 오해는 하지 마…꼭 오늘 이렇게 돼서 그런 건 아니야.”
정윤이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윤정의 손을 잡았다. 방금까지 홀딱 벗고 온몸을 부비적거렸는데 갑자기 내외하는 건가? 그는 약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리고 좀 귀엽기도 해서 그녀를 나무라듯 말했다.
“손? 장난해?”
그리고는 자신의 유방 사이 가슴골을 가리켰다.
“여기다가 뽀뽀해 줘.”
그 얼굴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놀란 듯했다. 윤정은 본체만체 가슴을 내밀고 기다렸다. 정윤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몸을 수그려 그의 가슴 사이에 입을 맞추자 윤정은 양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