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가야만 하는 자리

친구의 아버님께 드린 마지막 인사

by 내곁의바람

살다 보면 내가 가야만 하는 자리와 굳이 갈 필요 없는 자리가 있다.

굳이 갈 필요 없는 자리는 사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다. 갔다고 후회할만한 일도 아니거니와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티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가야만 하는 자리이다.


올해 내게 가야만 하는 자리가 있었다.

절친한 A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이 있었다. 병환이 있으셨기 때문에 돌아가실 것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언제든 때가 되면 A에게 달려갈 마음의 준비.


나도 아버님을 뵌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아버님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셨는데, 거기에 딸린 쪽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몰려가 생일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쪽방은 늘 A의 놀이터로 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하게 우리를 초대하고 아버님께 환하게 인사를 하던 걔의 들뜬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아빠, 나 친구들이랑 언니랑 놀러 와서 놀다가 갈 거야!"

아버님은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셨다.


그 장면만으로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A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사랑과 존경이 넘쳐나곤 했었다. 그 많은 일화와 자랑들 속에서 그 애 특유의 씩씩함과 의리 있는 성격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 딸이라 그런지 정말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부고문자를 받은 당일,

난 3일째 탈이 난 뱃속이 진정되지 않아 지치고 힘들었다. 장례식장까지는 고속버스로 2시간 반을 가야 했다. 이 상태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일 꼭 가겠노라 연락하고 차표를 예매했다. 당장 달려가겠다는 다짐이 무색했다.


다음 날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탔다. 장례식장 이름을 대니 택시 기사가 조문을 가느냐 물어 그렇다고 짧게 대답한 채 생각에 잠겼다.


버스 안에선 정신이 없었지만, 택시를 타니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려서 A를 보는 그 순간까지, 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A가 달려 나와 내게 안겨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꾹 참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이 말했다. 내가 여길 오지 못했다면 평생을 후회했을 것이라고.


A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애에게 아버님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그걸 안다면, 지금 이 순간 말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A의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영정사진 속 얼굴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비슷했다.


그날, 내가 가야만 했던 자리에서 돌아오며 A가 너무 많이 힘들지 않기를...

털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슬퍼할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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