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도망가고 싶은 날에는 책을 펼친다.
도망가고 싶은 날이 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지속될 때가 있다.
처음부터 책을 잘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방학이 되면 엄마가 매일 500원을 쥐어주며 말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 읽고 간식 사 먹고 와."
무슨 책을 읽냐니 읽고 싶은 거 아무거나 읽으라고 했다.
도서관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말을 잘 듣는 애여서, 정말 그 말대로 책을 한 권 읽고 500원짜리 과자를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걸 6학년이 될 때까지, 매 방학마다 했다.
처음엔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한 권을 읽었지만, 나중에는 시키지 않아도 도서관이 문 닫을 시간까지 주야장천 책을 읽었다. 방학이 아니라도 도서관에 놀러 가고, 책을 빌려와 집에서 읽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이 되면 책만 읽었다. 나중엔 학급문고에 있는 책은 모두 읽어본 것이라 시시해질 지경이었다.
본격적으로 밤을 새워서 책을 읽는 버릇은 내가 중학생 때 생겼다.
우리 집에 내 방은 없었지만, 작은 창고가 있었다.
보일러도 들어오고 형광등 불빛도 밝았지만 창고로 사용되던, 요를 깔면 그것만으로 꽉 차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옆 도서관에서 빌려온 두세 권의 책을 동이 틀 때까지 읽었다. 늦게까지 책을 보고 다음 날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엄마가 차려준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그때 나의 취미였다.
그 순간은 내게 특별했다.
다른 세상으로의 도망처럼 느껴지는 시간들.
사춘기 중학생에게 그만큼 안전한 공간은 없었다.
책 속에는 늘 다른 사람의 삶이 있었다.
나와 다른 성별과 나이를 가진 사람이 겪는 낯선 삶.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던지 공평하게 슬프거나 기쁜 일이 생겼다. 그것이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
그 세상으로 잠시 도망을 다녀온다 한들, 내 현실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이 환기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마음의 부스러기들이 흩어지는 기분. 개운해졌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어딘가로 훌쩍 도망가고 싶을 때면 책을 읽는다.
지금도 책 속엔 다양한 인물들이 갈등을 겪고 저마다의 슬픔과 사연에 잠겼다가,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 극복하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나도 조만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게 큰 위로가 된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이 해피엔딩임을 알고 있다면, 지금의 시련은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오늘도 어두운 밤, 혼자 마음이 깊어지는 이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이고 싶다. 책 속으로 잠시 도망가 보라고. 그곳에서 누군가의 삶을 마주하고, 웃고, 울고, 또 조금씩 당신의 마음을 쉬게 해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