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녁을 먹고 나서 운동장을 열 바퀴나 돌았다.
이대로 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봤자 졸기 밖에 더할까 싶어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온 다음 날의 공기는 목캔디를 먹고 난 뒤에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처럼 어딘가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다. 걷다 보면 배부름에 몽롱해진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겠지 생각하면서 러닝트랙에 발을 올렸다.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깁스를 풀고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의 고통에 비하면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라.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은 통증을 상쇄시키고도 남아 얼굴에 미소를 뗬다.
아직은 좀 걸었나, 싶으면 발이 붓는다. 걸음을 거듭할수록 탄산음료를 발바닥으로 삼켜내는 듯 한 감각이 발뒤꿈치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점차 더 촘촘하고 밀도 있게 흩어진다. 귀찮은 일 - 붓기 제거 목적의 족욕. 따뜻한 물 받아서 화장실에 20분 간 앉아있기 - 만들지 말고 한 바퀴만 돌고 들어가야지, 했던 게 무색하게도 한 바퀴 한참 지나 걸음을 멈췄다.
헤드셋을 끼고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걸었다. 평소 같으면 창피해서 잘하지 않는 짓인데, 날도 어둑어둑하니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앞뒤로 바짝 붙어 걷는 사람도 없어서 음정 박자 상관 않고 열창했다. 열 바퀴를 도는 내내 들은 노래는 라쿠나의 우리 집 강아지 HAPPY 단 한 곡뿐이었는데, 완벽하게 따라 부를 수 있을 때까지 걷다 보니 같은 장면을 열 번째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2절 벌스 첫 번째 문장 -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혼자 외로워하는 시간을 보낼 거야 - 에서 '자주'를 자꾸 '훨씬'으로 바꿔 부르는 바람에 노래를 3번이나 다시 불렀다. 그리고 브릿지 파트 -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는 전혀 모르지만 사랑을 난 아주 많이 전해 보내고 있어 - 에서 '전해 보내고 있어'의 리듬이 헷갈려 애를 먹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가사를 절었지만, 계속 부르다 보니 다 외워지더라. 외우다 보니 운동장 한 바퀴 돌 거 열 바퀴도 돌아지더라. 계속하다 보니 무뎌지더라. 관성이 생기더라 -.
걷지 못해 멈춰 있던 시간 동안 그냥 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
부르다 보면 외워지고, 내딛다 보면 걸어지는 법인데. 땅에 발이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깁스 풀고 제대로 걸으려면 꾸준한 허벅지 운동은 필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도 무시한 채. 하나를 못하게 되었을 뿐인데, 열 가지를 놓아버렸다. 나갈 수 없으니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발이 묶여 힘들었겠지만, 분명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냥 걷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엉덩이는 살짝 앞으로 내밀고, 배는 약간 집어넣은 상태에서, 어깨는 다시 뒤로 펴준다. 왼발이 앞으로 나갈 때 오른팔을 앞으로 뻗고, 오른발이 앞으로 나갈 땐 왼팔을 앞으로 뻗는다. 발뒤꿈치-발바닥-발가락 순으로 땅에 발을 붙인다. 좋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집중하다 보면 그냥 걸어진다. 그렇게 그냥 걷다 보면 좋은 자세로 계속 걸어진다. 좋은 것을 가져가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 관성을 만든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가사를 틀려 다시 처음부터 재생하는 순간이 좋아서 웃음이 났다. 왼팔과 왼다리를 같이 뻗었을 때에도 조금 바보 같은 나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잠시 웃음을 흘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 안의 관성을 이루는 하나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