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주는 마음
알람이 울렸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꽤 괜찮은 꿈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꾸고 싶어서 알람을 끄고 몇 분 더 졸다가 일어난걸 보니.
거의 두 달 동안 일어나자마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준비를 했는데 최근 사람들 말이 잘 안 들리는 문제가 생겨 몇 주 전부터 노래를 안 듣고 있다. 부모님이 아시면 깜짝 놀라실 부분이기에 후다닥 문제 해결에 나섰다. 확실히 아침부터 노래를 듣지 않으니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다. 대신 아침을 먹으며 강연 영상 등을 시청한다. 오늘은 소설가 김영하의 강연을 들으며 준비를 했는데 자기 해방의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글을 쓴다는 말을 듣고 다시금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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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한 명씩 오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피곤함과 귀찮음이 사라졌다.
한 아이가 다가왔다. 한 학기 동안 다양한 사건 사고가 있었고 그중 대부분의 사건에 항상 중심이었던 아이였다. 가만히 다가와 나와 멘토 선생님에게 박스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은 나는 순간 당황하여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 어제 멘토 선생님이 내가 곧 떠날 거라는 걸 아이들에게 말해서 다급히 준비한 선물 꾸러미였을 거다. 바로 수업에 들어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책상에 두고 하루를 시작했다.
한 친구는 나에게 알록달록한 편지를 건넸다. 내 이름과 보고 싶을 거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무지개 색으로 색칠해진 내 이름을 보자 마음이 아려왔다. 집에서부터 책가방에 고이 가지고 왔을 꼬깃꼬깃한 손 편지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벅찬 감정인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사실 아이들이 나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는 걸 이미 눈치챘다. 애써 모른척하려고 했지만 모르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교실 여기저기에서 내 이름이 들리고 커다란 종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 한 학생이 나에게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여진 종이로 만들어진 별을 건넸다. 삐뚤빼뚤 잘린 별 모양을 서로 겹쳐서 테이프로 감은 종이였는데 나에게 건네는 조막만 한 손이 또 나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하루가 끝나고 하교시간. 원래 인사를 하고 가던 아이들이 어쩐지 그냥 가버렸고 나는 애써 내가 먼저 인사하지 못했던걸 탓하며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오늘 아침 나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던 아이, 종이로 만든 별을 준 아이, 작은 손 편지를 준 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온몸으로 인사를 했다. 상자를 건네준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나도 밝게 인사했다.
돌아오는 길, 차에서 상자를 확인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웃음은 비웃음이나 코웃음이 아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웃음이었다. 상자에는 아이의 손길이 닿아있는 인형, 작은 파우치, 동전지갑, 손거울, 그리고 꼬깃 접혀있는 종이가 들어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감정을 글로 표현해보려 한다. 어린 시절 추억, 향수를 느꼈다. 친구들에게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마음을 표현하려 이것저것 내 보물을 다 모아 선물 꾸러미를 만들던 우리들. 지금의 값비싼 선물과는 감히 비교하지 못할 오로지 나의 마음만을 담은 선물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위한 선물에 내 마음을 담아본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점점 커가면서 가격을 따지고 양을 따지고 포장을 따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나에게 5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했으니 이번에 나도 그 가격에 맞춰서 선물해야지. 포장만 화려한 선물로 마음을 현혹해야지. 질보단 양이니 아무튼 많이 선물하면 되겠지. 돈도 없는데 왜 선물을 해야 하는 거지? 점점 내 안에서 선물의 의미가 변질되었다. 부담스러운 선물, 영양가 없는 선물, 형식적인 선물만 주야장천 준비하던 나였다. 감사한 마음도 문자 메시지로 대신하였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하는 마음이 부담스럽다며 선물을 등한시해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해야 할까,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순수했다고 해야 할까. 어렸을 적 나는 그저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잡동사니를 선물해 왔다. 돌려 말하지 못하고 내 많고 많은 생각과 감정을 가득 담아 꾸깃꾸깃 편지를 써왔다. 더 어렸을 적에는 내가 먹다가 맛있으면 부모님께 드렸었다. 그렇게 나는 어렸다. 그러나 그만큼 나는 표현할 줄 아는 아이였다. 감사하면 감사한 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냈다. 감사함이 미안함으로 둔갑되거나 부담스러움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나에게 선물을 준 아이들은 나에게 마음을 준거다.
그저 단순한 손 편지가 아니다. 쓸데없는 동전지갑이 아니다. 버려야 할 종이가 아니다.
선물이고 마음이고 기쁨이고 사랑이다.
이제 나는 마음이 더 아파올 예정이다. 내 교생 실습의 기억은 온전히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힘듦도 아닐 거다. 분명 힘들었고 피곤하지만 마음을 나누는 순간들 덕분에 행복도 했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 결국에는 이 모든 감정이 아우러지겠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아이들도 나도 멘토 선생님도 모두 밝게 웃길 바란다. 내가 언제 다시 이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 평생을 보내도 이렇게 22명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하기는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불가능하기에, 비현실적이기에 이 순간이 아름다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