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모든 가족에게는 그들만의 그림이 있다.

by 산율

모든 가족에게는 그들만의 그림이 있다.

색채가 화려한 그림일 수도 있고. 혹은 무채색 그림의 차분함, 안정적인 그림 일 수 도 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에너지를 뿜어낸다. 혹은 긴 여운을 주는 한 편의 시일 수 도 있다.

가족이 만들어 내는 그림의 계절감 또한 다양하다. 봄의 꽃처럼 향긋하고 화려하며, 여름의 장마처럼 눅눅한 습기와 짜증이 집안 공기를 무섭게 짓누르기도 한다. 가을날의 쓸쓸하면서도 깊은 운치가 머물기도 한다. 한 겨울 칼바람처럼 매섭고 시린 갈등이 몰아치기도 한다. 기쁨과 슬픔, 다정함과 서운함이 겹겹이 덧칠해진 그림이 있다. 그런 우리들만의 그림이 있다.

치매를 예방하고자 조심스레 붓을 드셨던 어머니의 그림 그리는 시간이 요즘 부쩍 줄었다. 카톡으로 보내 주시던 그림의 횟수가 줄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노년의 무게가 어머니그림 그리는 손끝에서 느껴진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사셨던 그 두꺼워진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그림은 사랑이었고, 가슴 저미는 따뜻함이다. 가끔은 가족만 바라보고 사셨던 그 어머니의 인생이 미련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 따뜻함, 답답함 이 모든 감정이 섞인 어머니의 그림들이다.


브런치라는 공간을 통해 어머니의 그림을 배경 삼아 에세이를 써 내려간 시간은 나에게는 쉼이었다. 가족에 대해, 부부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자식과 나의 사소한 일상들에 대해 돌아보는 통로가 어머니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면 세상이 원하는 그 방식으로 나아간다. 현재 내 모습에 만족보다는 욕심이 더 앞선다. 이 무한루프 속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말 그대로 하루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 속에 한 주 한 번씩 써 내려가는 '어머니의 그림'은 마음에 평화였다. 잠시 지친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하신 것은 그런 쉼이 아니었을까?


"쉼표도 음악이다. 쉼은 우리 삶에 중요한 음악이다."라 말한다.


그림에는 젬병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어머니 같은 섬세한 그림 솜씨가 없다. 색을 조합하고 형태를 잡아내는 감각에 있어서는 영 소질이 없다. 하지만 붓이 아닌 글로, 그리고 나의 삶이라는 또 다른 주제로 나만의 그림을 그려본다.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온몸으로 알려주신 사랑과 삶을 대하는 진실함, 성실함 그리고 절실함을 통해 나만의 색감과 감각으로 표현하고 싶다. 때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내의 잔소리가 섞인 시끄러운 배경으로, 때로는 건조하고 메마른 IT 전문가와 냉철한 투자자로 그리고 서툰 작가로서의 고독이 표현되는 그림일 수도 있다. 바람이 있다면 생명력이 있고, 따뜻함이 있고, 쉼이 있는 그런 에너지를 느끼는 그림이길 바란다. 멈쳐있는 정물화가 아닌 사람의 숨결이 넘쳐나고, 따뜻함이 흐르는 정겨운 풍경이길 기대한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그 사랑이라는 밑그림 위에 나만의 색채를 찾아가는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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