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안

by 모도리
에두아르드 뭉크, 태양, 1909


어떤 한 계기로 인하여, 감겨 있던 눈이 뜨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그는 태양을 마주한다. 눈동자에 엇비친 빛은 수많은 것을 창조한다. 어둠에 허우적 대던 사물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던 형태와 색이 드러난다. 그리고 크기와 위치도 드러난다. 태양은 그림자를 만들고, 세상에 빛과 어둠의 구분이 생기며, 여태껏 누리던 세상의 안락함은 사라졌다.


나는 심미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제 더러움과 깨끗함, 못남과 잘남, 추와 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두 가지로 분열하였고, 조화는 붕괴되었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사물이 다른 사물을 부정한다. 그러나 끝내 삶을 부정할 수 없다. 살아가야 한다. 바꾸어야 한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못난 것을 잘나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갑론을박이 많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우아한 고전미, 성인들의 수난기, 평화로운 일상, 장애인의 회복, 악인의 개심, 나른한 오후... 이 모든 것에 삶의 의지가 있다. 어둠과 고통이 짙게 얽매도, 빛과 희망은 뿌리치고 극복한다. 끝없는 자기부정은 이해할 때 종식되고, 분열된 세계는 재차 통일하고 조화를 이룬다. 파리한 안색에 분홍빛 혈기가 돌고, 섬약한 손은 힘을 얻어 주먹을 불끈 쥔다. 병든 인간은 건강을 되찾는다. 맞다. 건강. 건강이 아름다움이요, 깨끗함이며, 잘남이다. 아름다움은 극복이요, 의지며, 균형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영국, 1711


그래서 고전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전미는 본능이다. 화려함은 마음을 빼앗는다. 인간의 마음은 주먹 크기 밖에 안 된다. 심장은 작고, 화려한 자극은 버겁다. 피로감을 느낀 정신은 어서 평화로운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역사는 늘 반동하며, 진보 사상은 수 없이 새로운 탈과 단장을 바꾸며 요란을 떤다. 그러나 그 일부만이 보수 사상의 세계에 편입될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염증을 느끼는 존재기 때문이다.


장 폴 프라고나르, 사랑의 편지, 1771


18세기 귀족 예술의 절정인 로코코 예술은 아름답지만 마치 창부의 양식처럼 느껴진다. 부패한 궁정 문화와 귀족의 사치는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화려한 대궐과 요란한 드레스는 퇴폐적이다. 찌그러진 진주. 어딘가 마음 한편이 서늘한 데가 있다. 한 치의 더러움, 수치, 오점도 용납하지 않는 이 예술은 반대로 더 취약해 보인다. 세균에 내성이 없던 사람이 쉽게 병에 걸려 죽는다. 더러움을 용납 않던 로코코 양식은 그 어떤 시대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극치의 찬란함을 이룩하고, 혁명을 맞은 뒤 산산이 몰락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라트의 무도회, 1876


한편 병에 걸려 있지 않다면, 들개가 쫓아와도 달릴 수 있다. 19세기 중반, 사진기가 등장하고 미술이 의심받을 때 화가들은 발로 뛰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전과 정치적 주제에 몰두하는 대신, 밖으로 나갔다. 산과 강, 바다와 절벽을 화폭에 담고, 사람들 속에 묻혀 찬란한 일상의 순간을 생경히 그려냈다. 빛나고 요동치는 인상파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희망을, 미를 느꼈다. 정제된 고전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고전주의는 부패하고 있었고... 인상주의는 죽은 예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오스만 제국에 저항한 크레타 게릴라


아름다움은 삶의 균형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 정신의 객관성을 견지하고, 부패를 인식해야 한다. 방치된 댐이 무너지고 홍수가 도시로 밀어닥칠 때, 비로소 관리를 경시했음을 깨닫는다. 곰팡이는 나태와 우울 먹고 자란다. 그러나 이미 눈 뜬 심미안은 더러움을 금방 식별해 낸다. 우리는 역겨움을 느끼고, 본격적인 병이 나기 전에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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