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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시가 쉬웠으면 좋겠다

by 김선웅

시는 어렵지 않아야 한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시인의 이름과 시의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TV대담에서 어느 여류 시인이 자기의 시가 왜곡되는 것에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고 시험 문제로도 자주 출제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시작(詩作) 의도와 달리 엉뚱하게 해석하여 가르치고 문제를 낸다는 것이다. 인간 삶을 사유하는 서정시일 뿐인데 남북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이입하여 해석한다는 것이다. 시의 의미, 가치, 지향점을 왜곡하는 이런 경우는 꽤 많을 것이다.


1. 오감도(烏瞰圖) - 이상(1910~1937)

〈새로운 장르인가? 천재의 광기인가? 암호 같은 시〉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찻집 오감도는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다. 만남을 주선한 이로부터 약소 장소가 오감도라는 말을 듣고서 문학에 심취했던 청년 시절에 읽다가 덮었던 이상의 시 오감도가 떠 올라서 반가웠다.

찻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오감도라는 상호를 붙였을까? 이 난해하며 기이한 시의 의미는 알고 있는 건가? 대학로 이 거리에서 감수성 많은 청춘들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거나 해독할 수 없는 이 시의 신비함을 표현하려 한 것일까?

조감도(鳥瞰圖)는 새가 아래를 내려다보듯 땅이나 건축물을 표현한 지도나 모형도이다. 그러니 까마귀 오烏를 조합한 오감도(烏瞰圖)는 까마귀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 본 것이 된다. 건축 설계사인 이상이 원래 제명을 조감도라고 정했는데 인쇄소 활자공이 오烏와 조鳥를 실수하여 오를 꽃아 넣었고, 시집이 출판되었을 때 이상은 오히려 희열 했다는 일설도 있다. 평범한 새 조가 내려다보는 세상이 아니라 불길의 징조로 여겼던 까마귀 오의 세상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34년 발표된 오감도는 15편의 시가 차례대로 일간지에 게재되었으며 30편까지 연작 시로 예정되었으나 난해하고 불길하며 기괴한 탓에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이 시에는 시어(詩語)보다 아라비아 숫자가 반대 모양으로 반복되어 나열되거나 알 수 없는 문장이 띄어쓰기 없이 반복되어 있다.

반대 모양의 아라비아 숫자는 고대 유적 돌판에서나 볼 법하고 외계인의 암호 같기도 하다.

도무지 시인의 메시지, 의도를 알 수 없다. 시인 만의 독창성, 신비성, 실험적인 세계를 구축해 안에서 문고리를 잠궜는 지도 모른다.

시 발표 후 90년이 지난 지금도 해석을 위한 노력이 있지만 아직도 명쾌한 답은 없다. 일반적으로는 일제의 시대 상황에서 공포, 불안, 절망, 우울 등 사회의 정신적 병리현상을 표현했다고 해석한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불안의식에 잡힌 13인의 아해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며 암울한 시대 지식인의 공포와 좌절, 위기의식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13인의 아해(아이) 중 13이라는 숫자를 3.1 운동이라고 해석하는 견강부회도 있다. 이상은 민족주의자도 아니며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였다. 시체(詩體)에 있어서도 일본의 운율에 따르고 일본어로 수십 편의 시를 쓴 그 시대 그 상황의 조선 시민이었다.

그의 시는 천재성과 고단한 삶, 암울한 정신세계에서 광기 어린 혼자만의 독백일 수도 있다. 그 당시 난치병인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사업(다방 운영)에도 실패하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헤어져 심리적 공황 상태였을 것이다.

이상의 확장된 상상, 초현실에 도전, 시적 질서에서 벗어 난 그의 작품은 한편으론 한국 문학사의 새 장르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문학 세계에 돌을 던져 호수의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고 오감도와 같은 시 세계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24살 천재 시인의 모험적, 선구자적인 시도로 마냥 이해하고 말려한다.

난해한 시일수록 거대한 철학과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독자가 공감하지 못하고 울림이 없으며 독백과 같은 시는 그저 시인의 책상에서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유머가 있다. 유명 화가의 전시회를 위해 인부들이 작품 설치를 했는데 어느 작품 앞에서 화가는 마구 화를 냈다. 그림이 거꾸로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은 그저 둥그런 원일뿐이었다. 웃고 스쳤지만 이 유머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작가의 깊은 내면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추상적인 작품들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지식과 소양이 있어야 하는 건지 이런 작가들은 사람을 애매함으로 몰아낸다.


2. 국화 옆에서 - 서정주(1915·2000)

〈평이하지만 심오한 언어, 누구에게나 울림을 준다〉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947년 발표된 이 시는 대표적 국민 시이다. “한 송이 국화를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하는 이 시를 모르고 학창 시절 국어 시험의 만점은 어려웠고 사회에서도 한 구절쯤은 알아야 교양 면에서 접히지 않는다.

천천히 시를 읽노라면 장중한 분위기에 하늘과 자연, 무릇 인간의 성숙 과정이 그려진다. 봄, 여름, 가을의 섭리 속에서 먼 산 소쩍새의 처연한 울음과 먹구름 뒤에서 천둥이 우는 공포를 견디며 가을 무서리를 맞아야 국화가 피어난다. 모든 생명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의 영향과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문(詩文)에 어려운 시어는 없다. 한자어가 없음에도 이토록 간결하며 전달력이 좋다는 점에서 거장의 심오한 내공이 더욱 빛난다.

굳이 철학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두 번, 세 번 차분히 읽으면 그냥 감정이 일어난다. 여기에 약간의 해설이 도와준다면 시의 내면으로 들어 가 숙연해진다.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은 “자연 상태의 국화의 꽃핌을 넘어서 존재의 완성을 추구하는 생명체의 인고와 희열을 그려 낸 것” “시인의 젊은 시절 방황과 좌절을 뒤로하고 이제 성숙하고 안정적인 자리로 돌아온 모습” 등이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는 시인 자신을 표현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시인의 누님이 이혼이라는 방황을 거쳐 친정에 돌아온 모습이라고 배웠다.


3. 비목(碑木) - 한명희(1939~)

〈읽으면 그저 느껴지는 애절하고 처연함〉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碑木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러운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이 시는 음악을 만나 더 애절하고 한국의 3대 가곡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 가곡의 작사자(시) 한명희는 1960년대 군 복무 시절 강원도 화천 백암사 부근 계곡에서 양지바른 산모퉁이 돌무더기에 세워진 나무 비석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몇 단어만 제외하면 평이하고 서정적인 시어와 운율로서 중학생만 해도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다. 비목(碑木)은 나무로 만든 임시 비석, 초연(硝煙)은 전장의 화약연기, 초동(樵童) 친구는 땔감 나무 하던 고향 친구, 궁노루는 사향노루이다.

6.25 화약 연기 전쟁터에서 죽어 간 젊은 무명용사, 고향을 떠나 와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먼 곳 산기슭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낮에는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밤에는 궁노루 산울림 달빛 아래서 얼마나 고향이 그리울까? 이 세상 모든 것을 품은 어머니가 그립고 어릴 때 친구가 그립고 집에는 얼마나 가고 싶을까?

비극, 슬픔, 적막, 고독, 그리움이 절절한 시이다. 가슴에 애절함이 고스란히 사무친다. 비록 전쟁의 상흔을 그린 시이지만 6.25의 비극, 동족상잔 등 이념 쪽으로 시의 가치를 평하기보다는 생명이 결국 돌아가야 할 귀소(歸巢, 집, 둥지 등 원래의 장소로 돌아 감), 그저 평범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의 생애와 이별, 그리움을 생각하고 싶다.


4.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1950~ )

〈어려운 시에 반대하는 시인〉

꽃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이하 생략)


정호승 시인의 시이다.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이 한 구절쯤은 알거나 들어 봤을 것이다.

그의 시는 공감과 용기, 재기를 위한 에너지, 위안과 쉼터를 제공한다. 그의 시문은 일상의 쉬운 언어이다. 어렵지 않은 언어인데도 격조 있고 전달성이 높으며 대중적이다. 그는 난해하고 추상적인 시의 경향에 반발하여 반시(反詩)라는 문학 동인을 만들기도 했다.

‘부치지 않은 편지’, ‘이별노래’ 등 여러 편은 선율을 타고 대중에게 어필되고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1987년 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를 모티브로 그 죽음에 바쳐진 시이다.

쓸쓸하고 슬프지만 시인은 ‘그대’와 장엄하게 이별할 수밖에 없다. 이 노래(시)는 그 태생과 비장한 분위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 등 각종 추모영상의 배경음악으로 가슴 먹먹하게 깔리기도 하였다. 침잠되고 애절한 심경은 눈물보다 삶의 근본, 인간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이 시에서 한자어는 강(江)이 유일하지만 시의 깊고 절제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시가 고매하고 훌륭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5. 시는 어렵지 않아야 한다.

주옥같은 시 중에서도 필자 임의로 몇 가지 시를 예시하며 감히 논하는 것은 시는 어렵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의미와 메시지를 알 수 없는 난해한 시는 시인의 소장품이 될 뿐이다. 추상적인 시에서 그 분위기마저 파악하지 못할 때면 내가 무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당연히 시집을 덮어 책장 구석에 먼지 쌓이도록 박아 둔다.

책꽂이에 시집 한 두권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을 절반이라도 읽은 사람은 극소수일 거다. 오죽하면 시집을 냄비 받침대로 쓰면 안성맞춤이라고 할까?

요즘은 50~60대도 지면상 글보다는 스마트 폰의 영상이나 정보를 선호한다. 그 이하의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직관적인 걸 원한다.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어야 관심을 갖는다. 난해하고 추상적인 시는 거들 떠 보지 않는다. 난해한 시는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시인 등 문인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맴돌고 만다.

시를 쓰는 것은 영혼을 글로 나타내는 사색과 집중의 작업이다. 가볍게 웃으며 시를 쓰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주의 철학을 담은 시라 해도 읽는 이에게 울림이나 메시지가 없다면 그 시는 죽은 시이다.

물론 추상시는 그 존재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장르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추상시는 읽는 이에게 더 많은 상상과 사색의 심연에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독백이나 습작과 같은 시를 내놓으며 읽으라고 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학원가의 일타 강사는 거액의 연봉을 받는다. 강남 어느 대표 강사는 지난해 2백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강의를 상품화해 다양한 판매 경로를 통해서이다. 이들은 어려운 것도 핵심과 본질을 짚어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이것이 그들의 성공 신화 방법이다.

문득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노래를 감상하다 오감도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생명을 가진 시가 사람들이 공감하며 사색을 깊게 하고 성찰, 성숙, 연민, 위안 등을 갖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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