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행사가 있던 어느 봄날, 사무실 여직원이 체육 행사장으로 병아리 두 마리를 가져왔다. 지금은 아이 엄마가 된 큰 딸이 세 살 무렵 딸의 선물로 가져온 것이다.
병아리 선물이라니 좀 기이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고마웠다. 덕분에 병아리가 지치거나 죽을까 봐 체육행사 내내 건사하느라고 신경 쓰였지만,
고이고이 집에 데려오니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의 환희는 크기만 했다.
양계장에서 버려져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수컷 병아리는 면역력이 약해 쉽게 죽지만 일주일쯤 정성 덕에 손끝만 한 날개가 돋아나고 생기가 반짝였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풀밭에 나가 흙이라도 파 헤쳐 보라고 집 앞 화단에 풀어놓으니 쪼르르 쪼르르 잘도 뛰어다닌다.
잘 놀고 있길래 십여 분 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병아리들이 보이질 않았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에서 까치가 이미 병아리 한 마리의 내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얼른 쫓아버리고 나머지 한 마리를 찾고 있는데 철쭉나무 무더기 속에서 가냘픈 삐 삐 소리가 났다. 다행히 한 녀석은 그곳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그 보잘것없는 생명이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린 모습에 미안했고 그 생명이 살아 있음에 고마웠다.
까치가 다른 동물을 공격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동안은 벌레나 곡식을 먹고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놈 까치가 미웠다.
지난해 열일곱 살을 살고 떠난 우리 강아지는 열네 살, 열다섯 살 무렵부터 급격히 쇠약해졌다. 근육이 빠지고 귀가 안 들리며 다리에도 이상이 생겼다. 3.3kg였던 그 작은 체격의 몸무게가 2.7kg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우리 집의 막내이고 인형을 갖고 노는 귀염둥이였다.
애기 때부터 에너지가 폭발해 산을 뛰어오르고, 산책하노라면 작은 몸에도 용맹한 모습으로 잘 놀고 있는 비둘기며 까치를 쫓던 녀석이 기력이 약해지면서 점차 다른 동물이 부근에 있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간혹 까치가 다가오면 귀찮은 듯 잠시 쫓아버리는 시늉만 하니 까치들은 녀석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쪼아버릴 듯 뒤에서 콩콩 뛰며 성큼성큼 다가오기도 했고 감각과 순발력이 무뎌진 이 노견은 그것을 전혀 감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까치들이 괘씸했다. 기력이 쇠해지는 것도 안타까운데 한낱 새에 불과한 것이 개를 공격하려 하다니 얼마나 얕잡아 본 것일까?
영문을 모르는 녀석을 안고 집에 돌아와 “이 나쁜 놈의 까치 00들!” 하고 열을 내면 아내와 작은 딸은 킥킥 거리며 웃곤 했다. 난 진지하기만 한데,,,
녀석이 하늘나라에 가고 난 후 까치는 까치일 뿐이었다. 병아리를 잡아먹었든 사랑스러운 우리 노견을 무시했든 그게 본능인 걸 어찌 탓하랴. 녀석도 패기 있을 땐 비둘기나 까치를 귀찮도록 쫓아 버리지 않았던가?
까치들은 강아지가 더 이상 산책 나오지 않는 것이 궁금하지도 않고 그 이유도 모를 것이다.
지난 여름 폭염, 아파트 놀이터 가는 길에 새끼 까치가 쓰러져 퍼덕이고 있었다. 아마 비행 연습을 하다가 추락해 더 날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방치하면 고양이 먹이가 되거나 더위에 말라죽을 일이었다. 어미 까치는 주변을 날며 시끄럽게 울어 대는 것이 어미로서 어찌할 바 모르는 애타는 절규와 누구든 부근에 오지 말라는 경고음 같기도 했다. 얼른 물을 떠 와 조금 먹이고 그늘진 곳에 놔두니 곧 기력을 추슬렀다. 어미 까치는 따라와서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댔고 한참 지난 뒤 다시 찾아보니 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사하길 바랐다.
까치는 어둠이 걷히자마자 이른 새벽부터 먹이 활동을 한다. 상당히 부지런하고 부부애가 좋다.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까치집엔 부부가 같이 산다. 집을 지을 때도 공동 작업한다. 아파트 쓰레기통 봉투를 찢거나 뒤지는 모습이 추하기도 하여 깨끗한 먹이를 주고 싶은 충동이 종종 생긴다. 남모르게 구석진 곳에 간간히 먹이를 갖다 놓는데 십 분도 안 되어 없어진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싫어하니 눈치가 보이지만 마음은 풍족해진다.
해 질 녘이 되면 하루 종일 먹이를 찾던 이 미물들은 일과를 끝내고 키 큰 나무 위 까치집으로 돌아 가 곤한 잠을 청할 것이다. 삼라만상이 씨줄 날줄처럼 짜여 해가 뜨면 만물이 활동하고 밤이 오면 휴식하며 때가 되면 이별하는 것이 새삼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