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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우렁, 미꾸라지가 만든 근본

풍요한 세상에서 잠시 멈춰 과거를 보다

by 김선웅

오월 모내기 철은 일꾼 구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모내기는 한 철이라서 일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제법 논마지기나 갖고 있던 우리 집은 모내기 때가 되면 일꾼 수십 명을 모집하여 이틀간 일을 했다. 일꾼 모집은 오랜 기간 우리 집 농사 잔일을 맡아하는 아저씨가 도맡았다. 이 아저씨는 알콜리즘이고 가정에서 폭력적이었지만 그 부인까지 오랜 기간 우리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이라 끈끈한 정이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장사를 하느라 농사일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모내기하는 날은 새벽부터 부엌 두 곳이 분주했다. 더워지기 전 아침 여섯 시경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니 일꾼들 아침밥은 다섯 시 넘어서부터 먹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의 농사철 일꾼 단골 메뉴는 돼지고기국이었다. 앞다리 살을 듬뿍 넣고 김치와 새우젓, 고추장과 계란을 풀은 이 국은 정말 맛있었고 명품이었다. 일꾼들에게도 배가 든든하고 영양이 손색없는 음식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일을 나와야 고깃국이라도 먹는다.

참으로 어려웠던 70년대, 농촌의 저소득 가구에서 현금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일을 하든 지 농사철 이곳저곳에서 일을 해야 품삯으로 현금을 쥐게 된다. 일꾼 중에는 친구 아버지도 여럿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슬쩍 피하기도 했다. 가난이 창피한 어린 마음, 나름의 자존심에 그랬을 것이다.

(출처 : 공공누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모내기는 정말 고된 작업이다. 못줄에 맞춰 모를 심는 공동 작업이므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다. 누군가 꾀를 내면 그 자리는 클레임이 생긴다. 팀웤이 필요한 것이다. 첨벙첨벙한 논물에 앉아 쉴 수도 없고 해가 중천에 향할수록 뜨거워지는 태양, 검은색 징그러운 거머리는 하염없이 종아리에 달라붙어 피를 빨고 숙인 허리는 고되고 아플 수밖에 없다.

열 시경이면 여럿 아줌마들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가져간다. 그늘도 없지만 막걸리에 식사하고 휴식을 갖는다. 그리고 점심때까지 작업, 중간에 새참 한번 더하고 여섯, 일곱 시경이면 그날 작업이 끝난다. 일꾼들은 내일 다시 오늘과 같은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모내기가 끝난 들판은 애기 모가 머리끝만 내민 채 논물에 잠겨 있다. 일주일쯤 지나면 두 세명의 일꾼이 쓰러진 모를 세우거나 빠진 부분에 모를 심는 작업을 하게 된다. 보름만 지나도 뿌리가 자리 잡고 앳된 티는 벗어난다. 햇살과 바람에 간지럼 타며 잘 자랄 것이다. 일꾼들의 땀과 애환이 있으니 잘 자라야 한다.

자식들 중학교에도 못 보내는 형편, 방 한 칸 초가집에 사는 아저씨, 술과 독한 담배에 찌든 아저씨, 이들의 생활이 하염없이 논물에 잠겨 있는 저 어린 모에 스며 있다.

6월과 7월, 낮엔 뜨거운 햇빛과 바람이 만나고 종다리가 날아가는 더 높은 곳엔 솔매가 큰 원을 그리며 어느 집 닭장을 노렸을 것이다. 밤이 되면 하얀 달빛 아래 제 세상 만난 듯 개구리 합창에 빼곡해진 파란색 모는 서로 속삭이며 성숙한 티가 나고 들판은 진한 녹색으로 변해 간다.

장마와 폭염이 지나 간 후 부드러운 가을 햇살과 한가한 바람에 고추잠자리 노닐 때 새파랐던 모는 점차 누런 색 벼가 되어 수북한 알갱이를 자랑한다.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위에 까치가 서성이고 장대질에 대추가 툭툭 떨어질 때 이젠 추수를 해야 한다. 추수할 때도 많은 일꾼이 동원되었다. 벼베기는 모내기와 달리 힘들면 그 자리에 앉아 쉴 수 있는 점이 일꾼들에겐 장점이다.

(탈곡기. 출처 픽사베이)

탈곡은 한동안 펌프질 하듯 발로 밟아 구동하는 탈곡기를 썼는데 새마을 운동이 활발해지며 모터로 가동하는 동력기로 바뀌었다. 탈곡된 낱알을 가마니에 넣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 두면 한해의 쌀 작업이 끝난다. 고된 작업을 끝낸 일꾼들은 이 쌀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일꾼들의 노고로 만들어졌지만 그들은 보리 섞인 밥을 먹어야 했다. 생산된 쌀의 절대량이 부족했으니 당연히 가격이 비쌌다. 그땐 보리쌀이 쌀에 비해 현저히 저렴했다.

이렇게 고된 농사일에 그들의 수명도 조금씩 줄어들었을 것이다.

철이 들어 그때를 생각해 보면 참 소중한 쌀이었다. 그래서 어느 집이고 간에 쌀알을 흘리거나 버리면 크게 혼이 나곤 했다. 봄, 여름, 가을 자연의 고귀한 내림과 농부의 고단함이 쌀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콤바인. 출처 픽사베이)

산업화가 이뤄지고 농법이 개량되며 이젠 모내기부터 탈곡, 정곡까지 쌀농사는 대부분 기계화되어 예전처럼 농사일이 그렇게 고단하지는 않다. 더구나 품종 개량으로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고 미질이 좋아졌다. 농토가 줄어드는 데도 쌀 생산은 더 많아져 과잉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다. 3천만 인구가 5천만이 되었는데도 쌀이 남아돈다. 쌀값 안정과 농업 보전을 위해 농가에서 수매한 쌀을 보관하는 비용이 연 4,400억 원이라고 한다.

육류 소비량이 늘고 가공식품과 여러 가지 재료의 요리법이 다양해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0년 전에 비해 1/3로 줄었다고 한다. 풍족한 먹을거리 중 무엇을 선별하여 섭취해야 건강에 좋을지 고민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이다.

쌀밥은 탄수화물 덩어리라는 시답잖은 누명으로 어떤 땐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무슨 의학이 쌀밥을 성인병의 원인인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얼마 전 건강 검진 후 의사는 나에게 쌀밥을 먹으라고 했다. 온갖 매체에서 잡곡밥 먹으라고 난리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했지만 내게 부족한 영양소(뭔지는 기억 안 난다)가 있으므로 쌀밥을 권유했다.

“한국인은 밥의 힘(밥심)으로 산다”는 밥솥 광고도 있다. 맞는 말이고 주식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지만 전 세계에 쌀을 안 먹는 국가, 민족은 없다. 그만큼 재배하기 수월해 농업의 분포도가 넓고 생산량이 많으며 완전식품이기 때문이다.

쌀은 70년대까지만 해도 한말(8kg), 두말 다른 물건의 대가로 지불하는 대체화폐의 기능마저 있었다. 머슴의 인건비(지금의 연봉)로 일 년에 쌀 일곱 가마 하는 식이다. 쌀 현물로 주기도 하지만 쌀값에 해당되는 현금을 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국인에게 쌀은 삶의 기본이었다.

풍요한 생활의 일면이기도 했던 쌀이 이제 수돗물 같이 흔하게 되었다.

농부의 수고와 들판의 햇살, 산들바람, 논물에서 놀고 있는 우렁, 왕눈이 개구리와 미꾸라지, 가을의 메뚜기 대신에 이앙기, 농약살포기, 콤바인의 기계음과 휘발유 냄새를 맡은 벼 알갱이에는 해 질 녘 풀지게 지고 소를 끌고 집에 가는 농부의 애환이나 노동의 가치는 퇴색되어 있다.






10kg, 20kg 깔끔하게 포장된 쌀 포대는 마트 한쪽 편에 겹겹이 쌓여 있다. 사람들은 이 쌀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등급과 가격을 보고 구매하면 그만이다. 그저 여러 곡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세상이 변하는 걸 어쩌랴.

풍요하고 편리해진 지금 억지로 과거의 어려움을 반추하고 회귀 하자는 게 아니라 소중한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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