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가(鼠哥)의 운수 좋은 날

by 김선웅

나는 서가(鼠哥)이다. 지방 도시 중심상가 한쪽에서 몇 년째 살고 있다. 더 좋고 풍족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지만 멀리 이동하는 게 쉽지 않다.

밤이 깊어 열한 시쯤 된 것 같다.

일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밤이 깊을수록 좋다.

나가서 활동해야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아내는 며칠 째 누워 있다.

얼마 전 낮에 잠시 나갔다가 방심하는 사이 담배 꼬나문 청년이 던진 돌이 튀어 머리에 맞았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몸이 허약한데 외상을 입었으니 꼼짝도 못 하고 있다.

낮에 대놓고 활동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

사람들은 우릴 보면 차가운 눈빛으로 혐오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여자들은 소리 지르며 도망간다.

요즘엔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우리들의 목숨을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며 제거하려 한다. 그들은 우리의 목숨을 빼앗고도 전혀 죄의식이 없다.

우리 집은 상가가 즐비한 로데오 거리의 육교 아래 화단에 있다.

저녁이면 식당, 술집 등의 조명이 화려한 도시라서 제법 괜찮을 듯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먹고 살기는 그저 그렇다.

차라리 시골에 산다면 논밭의 작물로 그럭저럭 살겠는데 이사는 불가능하고 신선식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로데오거리의 불빛은 화려하지만 거리는 한산하다. 몇 년 전엔 이 시간에도 음식점, 술집, 노래방 등이 활기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저녁 문화가 바뀐 탓인 지 귀갓길을 향하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확실히 경기가 안 좋긴 한 것 같다. 벌써 몇 년째 불경기다.

그만큼 우리네 생활도 열악해지고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한다. 자식이 많다 보니 식량 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늦은 시간엔 사람이 없어 돌아 다니기에 마음이 편안하긴 하다.

오늘은 어디로 가야 좋을까?

육교 계단 끝에서 대각선에 있는 고깃집을 먼저 가봐야겠다. 이 건물은 삼겹살, 곱창, 족발집 등 음식점이 여러 개 입점해 있고 귀퉁이에 쓰레기봉투를 모아놓고 있다. 그곳까진 삼십여 미터 거리다. 이동할 때는 내 몸이 완전 노출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주변을 살피며 잽싸게 달려 쓰레기봉투 뒤로 숨었다. 이곳은 흡연구역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는 곳이다. 이런 풍경은 영 모양이 좋지 않다. 금연 표시가 있지만 마땅히 갈 곳들이 없나 보다. 지저분한 이런 데서 담배 피우는 모습은 구질구질하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서 지금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길고양이가 불시에 나타날 수 있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봉투 하나를 뜯어보니 검은 비닐봉지에서 고기 냄새가 났다. 그걸 헤치니까 마늘이며 김치가 묻은 삼겹살 조각들이 꽤 있다. 아. 대박이다. 이것만 가져가도 내일까지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이다. 누가 먼저 왔다 갔는지 저쪽 봉투엔 족발 뼈다귀가 흩어져 있다. 살점이 좀 붙어 있고 먹음직한데 발골(發骨)하여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최대한 이곳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가로등 조명이 너무 환하다.

집까지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수년간 경험상 조심만 하면 큰 탈은 없다. 우리가 좀 빠른가?

길고양이든 우리 종족이든 이런 물건을 확보하려면 봉투를 찢고 헤집어야 꺼낼 수 있는데 누구에게도 뒷정리를 하는 능력은 없다. 그러니 주변이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욕먹는 게 당연하다. 길고양이가 한 짓도 우리가 욕먹는다.

집안에 서식하며 피해를 주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지금의 우리들은 제법 신사적이다.

방안 천장에서 우르르 뛰어다니고 똥, 오줌을 지려 고약한 냄새로 피해를 주며 옷장 귀퉁이나 옷가지 등 기분 내키는 대로 물건을 갉아 놓던 선대(先代)들에 비해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 또한 우리 종족의 개체 수도 많이 줄었다. 그만큼 살기 힘든 여건이다.

우릴 전문적으로 제거하는 업체도 있다. 세스코라는 방역업체는 귀신같이 나타 나 삶의 터전에서 쫓아낸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우릴 미워할까?

돌을 던지고 덫을 놓거나 독약으로 살해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세 유럽에서는 인구의 삼분의 일이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원인은 우리들 몸에 기생하는 쥐벼룩이었다. 우리가 옮기고 싶어 옮긴 건가? 우리도 쥐벼룩을 퇴치하고 싶지만 그럴 기술이나 수단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난했던 시절, 어렵게 농사지어 보관하는 곡식, 채소 등 생존을 위해 아끼며 저장했던 것들을 우리 선대들은 염치없이 갉아먹고 더럽히고 했다.

시궁창에 살던 종족이 방안까지 들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쌀독에 들어가 똥을 싸놓고 했으니 우릴 좋아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또한 번식력이 좋아 반년이면 이백마리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죽고 낳고 죽고 낳고,,,,

예전엔 우리들을 죽이기 위해 전국이 한날 한시에 독약을 풀어놓는 날도 있었다. 우매한 놈들이 그걸 먹고 대량으로 죽어 나갔다. 홀로코스트가 따로 없다.

아침이 밝았을 때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죽어 간 이 종족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다행스럽게 요즘엔 그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 아파트 등 주거양식의 변화로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점차 줄어들어 우리 종족들이 많이 감소되고 있다.


우리들에겐 공포의 맹수, 고양이는 많이 순화 된 것 같다. 어떤 녀석은 우릴 보고도 관심 없다는 듯 지나치거나 뚫어지게 관찰하다가 쿨하게 가버리는 고양이도 있다. 그러나 악질 길고양이에게 걸리면 수십분 간의 고문에 시달리다가 먹이가 된다. 그 놈들은 우리를 쥐었다 풀었다 위로 던지고 떼굴 떼굴 굴리며 우리 종족의 공포를 즐기다가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저 실컷 노리개로 즐기다가 죽이기만 하고 가버리기도 한다.

길고양이는 심야의 자객과 마찬가지다.

산책 나온 강아지 중엔 우릴 보면 짖는 경우도 있지만 신기한 듯 호기심으로 쳐다보거나 겁많은 녀석은 뒷걸음 치기도 한다.

같은 동물로 태어나 저 강아지나 고양이는 영양을 배려한 사료, 단정한 몸매, 사람들이 안아주고 뽀뽀하고 끌어안고 자는데 이 놈의 팔자는 어찌 이리 눈치보며 생과 사의 전선에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일까?

겨울엔 따뜻한 방에서, 여름이면 에어컨 있는 집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강아지나 그릉 그릉 하며 주인에게 아부하는 고양이놈이 애교라도 부리면 사람들은 이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집에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지내는데 그 녀석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아니 더럽다고 피하는 것 같다.


우린 열두가지 띠 중에서도 제일 선두에 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이런 식으로~

만화 영화 주인공으로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에서 영리한 동물로 나온다.

또한 성실하고 알뜰하며 재물을 모으는 상징으로도 묘사된다.

우리와 비슷한 햄스터, 기니피그 등은 사람들이 귀엽다며 키우기도 한다. 다람쥐는 동요에도 귀엽고 깜찍하며 재주많은 걸로 등장하는데 우린 태생이 더럽고 천박하여 어둠의 세계에 갇혀 있다.

비둘기도 유해조수로 지정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먹을 것을 준다. 새우깡이며 라면부스러기, 쌀알 등 곡식~

어떤 아주머니는 가방에서 쌀을 한 줌 꺼내더니 비둘기 모여 있는 곳에 뿌려주고 누가 볼까봐 성급히 걸어갔다. 신고되면 과태료를 문다나?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란 건 개뿔이다. 털 날리고 처마밑이나 주차 된 차에 똥 테러를 가하는데도 사람들은 투덜거릴 뿐이다. 우리가 그랬다면 독약을 살포하느니 하면서 난리를 칠 것이다.

이 녀석들은 사람이 옆에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지능도 우리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으로 여긴다.

무슨 특권인가? 이런 불공평이 어디 있는가?

우린 태어날 때부터 불가촉천물(不可觸賤物)로 운명 지어졌다.

운명인가?.

운명은 바꿀 수 있고 숙명은 피할 수 없다 하니 숙명이 맞는 것 같다.


오늘은 먹을 것을 제법 구했다. 삼겹살에 햄조각까지 확보했다. 옛날엔 햄이 비싸고 귀해서 사람들도 쉽게 못 먹었다 하지 않는가.

운수 좋은 날이다. 화단 귀퉁이 집 앞에서 보니 건물 사이로 달이 둥둥 떠 있다. 상가의 환한 조명과 달빛아래 내 모습이 처량한 것은 감출 수 없다.

아픈 아내가 이걸 먹고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자식들에게도 적당히 먹일 수 있는 양을 구했다. 이 녀석들이 좀 더 커야 독립시킬 수 있다. 몇 녀석은 인사도 없이 벌써 가출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우린 한번 이별하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다. 그래도 모두 독립시켜야 한다.

이 불공평한 세상 자식은 왜 낳아야 하는지,,,

70년대 맹인가수 이용복은 "어머니,왜 날 낳으셨나요"라는 노래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나는 왜 태어 났을까?


사는 게 뭔지 문득 우울감이 왔지만 오늘 밤처럼 고즈녁하고 물량이 많은 날은 드물다.

가난하고 고달픈 운명이어도 이 세상에 살 권리는 있다. 이 세상은 인간만을 위한 세상, 우리를 공격하려는 적들의 세상만은 아니다.

배부르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내 영역에서 나도 살아가리라.

하늘은 우리들의 생명을 이유없이 주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명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인간들이여, 우릴 혐오하지 말고 살게 해 주소서. 최대한 눈에 안 띄게 할테니~~♧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느 비둘기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