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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의 종점은 어디인가?(3화 중 1화)

그곳에 사는 사람들

by 김선웅

이 이야기는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등 대북교류가 활발했던 노무현 정부 말기와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런대로 대북 기조를 이어갔던 이명박 정부 초기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통일부에 파견 근무할 당시 열흘간 평양, 남포를 방문했던 기억을 수필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비록 세월이 많이 지났고 짧은 기간의 방문이었지만 그때나 2025년 지금이나 북한의 실상과 본질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창하며 남한을 동족이 아닌 핵무기 사용의 대상으로 강고히 했다는 점이다.(이전까지 북한은 동족에게 핵무기 사용할 일은 없다고 해 왔다.)

우리 정치, 사회에서 통일론은 거의 소멸되었다. 통일에 반대하는 여론도 70%에 달한다. 대세적인 정서는 골치 아픈 통일, 정치에 이용해 온 신물 나는 통일론 따위 집어치우고 속 편하게 따로 살자는 추세이다.

같은 언어, 유교 풍습에서 살아온 이 민족이 백 년, 이백 년 후까지도 무지막지한 국방비를 쓰며 서로 많이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고 긴장과 적대감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정치, 사상의 이질성으로 평행선을 달리는 이 민족이 만나는 곳은 언제, 어디일까?


이 글은 수년 전에 쓰여 소수에게 발표했던 것인데 연재를 계획하면서 원문에 없던 부분을 추가하였다.

그럼에도 통일이 만능일까 하는 부분이다. 이 글의 본질을 흔들 수 있어 고심했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다. 에필로그 부분에 서술하였다.



평택항에서 남포항으로, ‘갈 수 없는 나라’를 가다.

예전부터 가진 꿈,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 조만간에 꼭 이뤄야 할 꿈 그것은 크루즈 여행이다. 10만 톤 급 이상의 고급스러운 대형 선박의 온갖 편의시설을 이용하며 호텔 수준의 객실에서 바다를 관망하고 유명 외국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은 정말 럭셔리할 것 같다.

꿩대신 닭도 아닌 참새 수준의 비슷한 기대감을 갖게 한 기회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약 1년 반 통일부 개성공단업무에 파견되었을 때이다. 사무실은 남대문 부근에 있었으며 간혹 개성공단에 입출경하며 일을 봐 왔다. 개성공단에 출장 가면 출장비를 국외 출장 기준으로 받는 아이러니도 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개성공단사업을 시작했고 많은 관광객이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에 열중했으며 북한에 대한 각종 물자지원을 매우 활발히 할 때이다.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경쟁하듯 북한에 쌀, 의약품, 철강, 시멘트, 감귤 등 북한에서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는 건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었다.

통일부는 십 수차 쌀을 배편으로 북에 보내고 있었고, 그해 가을 쌀 수송지원단엔 내가 선발되었다. 중앙부처는 나 그리고 경찰청, 국방부, 농산물유통공사 이렇게 4명이 지원단으로 구성되었고 내가 단장을 맡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행동요령, 하역상황 체크, 경비사용 등을 교육받고 7일간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7천 톤급의 베트남 선박에 쌀 5천 톤을 싣고 평택항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길이다.

남포는 평안남도 남서부 대동강 하구에 있는 북한 제2의 도시로서 특별시이며 평양까지는 40km 거리다. 대동강어구(漁區)에 있는 남포항은 외항으로서의 입지 조건을 모두 갖춘 국제 규모의 항구라고 한다.

당시 우호분위기 속에 적성국가에 간다는 걱정은 전혀 없었고 북한의 실상을 짧게나마 볼 수 있게 되어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했으며, 평양 참관까지 가능하다 하니 그 기대는 충천했던 것이다.


적막한 밤바다, 파도를 가르며 북으로 향하다.

첫날 오전 10시경, 평택항에서 관계공무원의 안내에 따라 소형선박을 이용해 멀리 정박해 있는 화물선으로 옮겨 탔다. 그 선박은 태국에서 쌀(태국산)을 싣고 온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내 방은 단장이라고 배려했는지 화장실 딸린 방을 주었는데 2평도 안 되는 방, 너무 좁고 썰렁해 크루주의 아늑한 객실 꿈은 한방에 날아갔다.

다른 직원들의 방은 1평이나 될까? 접이식 작은 침대와 여행가방 놓으면 거의 움직일 공간이 없는 지경이었다.

곧 선박은 ‘갈 수 없는 나라’를 향해 출발했고 다음 날 오후 7시경 도착 예정이라 한다. 지도상으론 먼 거리가 아닌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약 32시간.

몇 시간 지나니 핸드폰이 안된다.

걱정이 되는 것은 초등생, 중학생인 두 딸만 집에 있다는 것이다. 교사인 아내는 내 출장 시기와 겹쳐 수학여행을 가버렸다. 한국에 연락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 고립감을 가져왔다.

짐을 풀고 휴식을 가진 뒤 우리 일행들은 식당에 모여 이른 저녁 겸 도란도란 얘기하다 보니 친밀감이 쌓이고 밤은 깊어지며 소주병도 쌓여 갔다. 경찰청 직원이 입심도 좋고 술도 잘 마셔 분위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국방부 중령은 군인 티를 안 내고 맞장구를 잘 추어줬다.

우리들의 만찬이 끝나고 밤늦게 선미(船尾)로 나와 바다를 보니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선박의 LED 조명만이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치며 힘차게 나가는 선수(船首) 쪽을 비추고 있다. 갈라지는 물결 소리, 조명에 비치는 하얀 물보라, 거침없이 물결을 세차게 치고 나가는 이 화물선은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바다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추웠다. 화물선인지라 승무원이 적었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난방을 부탁할 상대가 없는 것이다. 추위와 기계음에 선잠으로 밤을 새웠다.


◆ 남포항에 도착하다(2일 차).

베트남인 요리사의 아침 메뉴가 입맛에 맞을 리 없다. 모두 라면을 끓여 밥 말아먹기로 한다. 정오가 지날 무렵 유명한 서해갑문을 지나며 인민군의 근무교대장면을 보았는데 걸음걸이와 좌우로 흔드는 팔동작이 좀 우스웠다.

남포외국인선원구락부

서해갑문에서 지체한 시간이 한 시간은 더 된 것 같았다.

둘째 날 저녁 7시경, 남포항에 접근했다. 남포항에는 접안(接岸)을 기다리는 선박이 많아 두 시간 정도 배에서 대기했으며 북한 검역소 직원인지 올라와서 열체크를 했다.

세명의 직원이 형식적인 검역 후 라면이 먹고 싶다 하여 베트남인 요리사에게 주문했더니 금방 알아들었다. 요리사는 그간 여러 차례 남포에 와본 듯 통상적인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중 한 명은 신라면 두 개를 간단하게 먹는다.

그들이 하선할 때 교육받은 대로 라면, 담배 등을 챙겨 보냈다. 당연한 듯 가지고 갔다.

저녁 9시경, 드디어 접안이 끝나고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 직원 두 명이 올라왔다.

눈이 부시었다. 놀라웠다.

두 명중 북한 책임자의 훈남 스타일이 너무 세련되고 잘 생기고 매력적이었다.

강남 한복판에 세워두면 오빠부대가 생길 것 같은 첫인상이었다.

지금이라면 남한의 박보검?

그들의 안내로 하선하는데 남포항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인민군 1개 소대가 줄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흑백영화처럼 그저 어둡단 인상의 남포항, 그들의 안내에 따라 승용차로 숙소를 향해 간다. 벤츠를 타고 간다. 처음으로 벤츠라는 걸 타 봤다. 이 벤츠에 대해선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대동강변에 위치한 ‘남포외국인선원구락부’

구락부(俱樂部)는 클럽을 일본식으로 발음하고 한자로 쓴 것이며 70년대 까지는 한국도 많이 쓴 것 같다.

이층으로 된 여관급의 숙소이다. 지배인인 듯한 노인이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이층 객실까지 운반해 준다. 미안해서 사양했는데 한사코 본인이 이층까지 들고 올라간다. 북측 대표단에게 줄 선물까지 있어서 꽤 무거운데,,,,

친절함이 느껴졌다.

우선 숙소에서 국제전화로 중국의 한국대사관에 도착보고를 했다. 그러면 대사관에서 통일부에 상황을 전달해 준다. 국제전화 교환원인지 좁은 부스에서 군복차림의 남자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하기 위해 50미터쯤 떨어진 식당으로 모였다. 외빈용이어선지 그런지 제법 꾸며놓았다.

저녁은 환영만찬의 형식이다.

정갈한 반찬, 파트너와 의례적인 얘기 나누며 천천히 식사하고 있는데 정전이다. 말로만 듣던 전기부족, 난 그마저도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들은 익숙하게 촛불을 가져왔고 십여분 지난 후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식사 후 이층 라운지에서 노동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에는 한국의 단체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결연 맺은 소식도 있으며 당시엔 워낙 교류가 많아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웠다. 또 정전이다.

종업원이 촛불을 가져다주었다.

잠시 후 북한 대표가 와서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 준다. 그간 수차례 한국팀이 방문한 탓에 일정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쌀 하역은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고 5일 정도 걸린다 한다. 대단한 모순이지만 하역상황 체크는 우리 의사대로 할 수 없었으며 북측의 허락, 인솔 하에서만 가능했다. 그 많은 식량을 지원하면서도 우리가 을의 입장이다. 하역할 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니 내일은 서해갑문을 참관하자고 한다.

서해갑문은 90년대 초반 서울불바다 등 전쟁위기가 고조될 무렵(정말 살벌했던 시절) 카터가 방문하여 김일성과 유람선에서 회담하고 사진 찍고, 노대통령이 김정일과 사진 찍은 포토 존이 있다.

쌀은 정해진 대로 하역될 것이고, 전에 다녀간 팀처럼 관례대로 평양 참관 의사를 표시하니 기다렸다는 듯, 일단 상부에 보고해야 하고 경비는 인당 백달러라고 한다.

내일 가능 여부를 알려주겠다며 그날은 서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3화 중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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