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사는 사람들
이 이야기는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등 대북교류가 활발했던 노무현 정부 말기와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있기 전까지 그런대로 대북 기조를 이어갔던 이명박 정부 초기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통일부에 파견 근무할 당시 열흘간 평양, 남포를 방문했던 기억을 수필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비록 세월이 많이 지났고 짧은 기간의 방문이었지만 그때나 2025년 지금이나 북한의 실상과 본질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창하며 남한을 동족이 아닌 핵무기 사용의 대상으로 강고히 했다는 점이다.(이전까지 북한은 동족에게 핵무기 사용할 일은 없다고 해 왔다.)
우리 정치, 사회에서 통일론은 거의 소멸되었다. 통일에 반대하는 여론도 70%에 달한다. 대세적인 정서는 골치 아픈 통일, 정치에 이용해 온 신물 나는 통일론 따위 집어치우고 속 편하게 따로 살자는 추세이다.
같은 언어, 유교 풍습에서 살아온 이 민족이 백 년, 이백 년 후까지도 무지막지한 국방비를 쓰며 서로 많이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고 긴장과 적대감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정치, 사상의 이질성으로 평행선을 달리는 이 민족이 만나는 곳은 언제, 어디일까?
이 글은 수년 전에 쓰여 소수에게 발표했던 것인데 연재를 계획하면서 원문에 없던 부분을 추가하였다.
그것은 통일이 만능일까 하는 부분이다. 이 글의 본질을 흔들 수 있어 고심했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다. 에필로그 부분에 서술하였다.
◆ 남포특별시와 서해갑문
아침, 이층 라운지에서 유리창 너머 대동강이 보인다. 그런데 유리창의 표면이 균질하지 못해 보는 위치에 따라 대동강이 옆으로 길게 위아래로 길게 보여 눈이 금방 피곤해진다. 식사 전 숙소 앞 대동강변을 짧게 산책해 보니 이른 아침부터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엊저녁은 어두워서 못 봤지만 식당으로 가는 잔디밭길 한쪽에 족구장이 있고 숙소 부근 초소에 여군이 근무하며 멀리 선착장의 대형크레인이 보인다. 아침 식사 후 노동신문을 대충 읽고 있는데 북측 대표가 서해갑문에 가자한다.
우리 일행은 두 명씩 나뉘어 벤츠에 올라탄다. 벤츠의 로고인 삼각별은 초라하게 본넷 앞에 의미 없이 매달려 있다. 이 벤츠는 아마 30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힘들고 가엾어 보이고 이젠 그만 쉬고 싶다 하는 것 같다. 크기는 국산 k3정도 되며 중간에 전체 도색한 느낌이 나고 얼핏 봐도 참 노쇠했다.
서해갑문으로 가는 길은 남포시내를 통과하며 왕복 6차선쯤 되는 길엔 중앙선도 횡단보도도 없다.
중앙선이 있을 필요가 없다. 서해갑문까지 30분 동안 다른 차량을 한 대도 못 봤다.
드물게 사람들은 도로를 가로질러 통행하고 자전거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 주변 건물들은 거의 5층 이하의 흰색이며 우리가 볼 땐 마트 같지 않은 건물에 무슨 식료품점, 이발소 등 붉은 글씨로 크지 않게 쓰였다.
저 건축양식은 공산권 특유의 것인가? 러시아 스타일인가? 차량도 사람도 별로 없으니 시내가 깨끗하다.
서해갑문,,,
대동강 하구에 있는 세계적 규모의 북한 최대 갑문이라 한다.
이 갑문 건설로 남포항은 국제항구의 모습을 갖게 되고 홍수 때는 바닷물이 역류하여 생기는 평양의 물난리를 방지할 수 있으며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공사기간 중 각 네차례 씩 현지 지도한 대규모 공사라 한다.
서해갑문에 도착해 홍보영상을 보니 김일성이 물길을 잡아주고, 인민군이 가열하게 노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김일성과 지미카터,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이 기념 촬영한 포토 존에서 북한 여성 안내원과 포즈를 취해봤다.
점심은 남포시내였는데 도무지 어떤 곳이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주택가 어느 곳 이층에 올라가니 식당이었다. 북한은 우리처럼 상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가게는 물건을 내놓고 팔지 않는 것 같다.
점심으로 토끼구이가 올라왔다. 토끼의 통모습 거의 그대로 식탁 가운데에 놓였는데 그 형상에 거부감이 들어 눈치껏 다른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계산서는 무엇인가?
약 이백달러, 이걸 우리더러 내라 한다. 응? 북한 측의 접대 아니었나?
오천톤의 쌀을 싣고 온 한국대표단에게 식대를 지불하라니? 전에 왔던 대표단들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씁쓸,,,
오백불은 별도로 지불했다. 그 돈은 우리들의 숙식비이다.
지원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숙식비를 지불해야 하고 환영과 송별의 비용도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하는 이상한 나라임이 틀림없다.
서해갑문에서 돌아와 하역 상황을 듣고 남은 시간은 다른 일정 없이 숙소에서 하역진행을 기다렸다. 하역모습을 직접 보고 싶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저 쌀이 북한 주민에게 가는지, 군량미로 가는지 감시할 방법이 없다.
◆ 평양의 밤하늘
서울시 방문단인지 시청직원들과 식당종업원 간에 식당 옆 족구장에서 족구시합을 하고 있다.
같은 민족, 사는 곳만 다를 뿐 같은 생김새, 언어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이념만 아니라면 원수처럼 대립하고 협박하며 살 일이 아닌데 저들은 남북이 친선 족구시합을 하고 있는 그 시간에도 핵무기 개발에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엊저녁 라운지가 생각난다.
서울시 공무원인 듯한 사람이 인민복 차림의 어느 직원에게 훈계를 하고 있었다. 지나가며 얼핏 들어보니 술에 취한 듯 불콰한 얼굴로 북측 직원에게 '너넨 이래서 못 산다' 등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좀 아찔했지만 둘이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된 듯 북측사람은 위축된 자세로 듣고만 있었다. 초창기 남측 대표단이 북측 노인에게 ‘동무’라는 호칭을 했다가 애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평양방문이 승인되었다.
오후 3시경 고물 벤츠에 탑승해 평양으로 출발한다.
남포 평양 간 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 정도 되며 40분가량 소요된다.
여기에도 중앙선은 없다.
고속도로 주변은 옥수수 등 각종 작물이 우거지듯 펼쳐져 있고 우리와 다른 건축양식의 민가가 낡은 모습으로 드문 드문 보인다.
벤츠의 승차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바닥소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양 손바닥을 엉덩이에 깔고 평양까지 갔다. 40분간 차량은 3대 정도 본 것 같으며 모두 일제 도요다이다.
일본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적국으로 상대하면서도 일본차라니,,,
평양시내에 들어가기 전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에 들렀다. 전형적인 한국의 초가집, 대지가 40여 평 될까?
왼쪽부터 부엌, 안방, 작은 방이 일자로 있고 마루가 붙어 있으며 맞은편엔 창고가 있는데 쇠시렁 등과 발로 구동(驅動)시키는 탈곡기가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이 정도면 빈농은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104세의 김형석 교수는 아직도 강연 등 활동을 한다.
김일성과 같은 동네에 살던 김형석 교수는 김일성의 할아버지로부터 부름을 받아 김일성과 같이 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교수는 김일성보다 여덟 살 아래이며 김일성의 외조부가 설립한 학교의 선후배라 한다. 아마 같은 동네에 있다 보니 밥 한 끼 한 걸로 보인다.
여성안내원은 김일성의 고난사와 인민을 위한 헌신을 설명하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방문객이 올 때마다 저런 눈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만경대는 넓은 주차장, 매점과 커피가게가 있었다. 단체 관광객이 오는 것 같다.
테이크 아웃 커피, 이번에도 돈은 우리가 낸다. 그래도 분위기는 화목했다.
차량으로 이동 중 북측 대표가 여성안내원에게 나를 가리키며 “김단장님 나이가 얼마일 것 같습니까?” 하자 여성안내원은 특유한 억양으로 “뭐 많아봐야 삼십 초반이겠지요” 해서 웃었고, 북측 대표는 “단장님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 쏘십시오” 해서 한번 더 웃었다.
쏜다는 말은 한국 측 언어인데 교류가 많다 보니 북한에서도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민족인데 우린 왜 대립하는가? 왜 북한은 한국을 타도하려는가 하는 생각에 잠시 착잡해졌다.
만경대에서 평양시내는 가까웠고 조용했다. 평양 초입으로 기억되는데 고층아파트가 초행자를 압도했다. 고층, 생경(生梗)한 현대식 디자인, 청결이미지.
평양시내는 지금과는 너무 다르게 차량도 거의 없고 그래서 깨끗해 보였다.
우린 먼저 대동강변에 있는 주체사상탑으로 갔는데 횃불 조형의 이 탑은 북한 관련 뉴스에서 배경화면으로 늘 등장한다.
이 탑은 높이가 150미터라 한다. 이 탑 맞은편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역시 뉴스 화면으로 자주 나오는 인민대학습당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올라보니 평양 시내를 360도 관망할 수 있었다. 서울의 한강처럼 평양 한복판엔 대동강이 흐른다.
내 나름 평양 시내를 굳이 나눈다면 신도시와 구도심으로 구분하겠다. 신도시는 그 유명한 류경호텔등 계획지역이고 구도심은 연립주택 등으로 구성된 것 같다.
안내원은 구도심을 가리키며 저쪽은 6.25 때 미군이 한집마다 폭탄을 한 발씩 퍼부은 곳이라 설명했지만 반공교육세대인 난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입은 피해가 얼마인데,,,
여성안내원은 별 관심 없다는 우리의 반응을 보며 더 이상 미군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난 미군이 우리 민족의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하에 내려오니 기념품점, 찻집 등이 있다. 지하상가인 셈이다.
주체사상탑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하여 현대에서 지어준 정주영체육관을 차로 둘러보았다. 신도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인 대형교회도 있다.
대동강 철교를 지나 어둑해질 무렵 식당으로 향했다. 퇴근하는 평양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린다.
우리가 간 곳은 ‘민족식당’,
규모가 매우 크고 고급스러우며 라이브 공연하는 극장식 식당이다.
해물위주의 성찬이 준비되어 있고 이십 초반의 종업원 두 명이 전담해서 서빙을 해준다. 모두 예쁘고 매너가 좋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 사람들이 보인다.
북한은 비동맹국가와 활발한 외교를 하고 있다. 예컨대 잠비아, 예멘 같은 그런 나라들,
저녁 9시경 식사가 끝나고 이제 남포 숙소로 돌아간다.
어두운 평양시내, 그러나 초입에 있는 현대식 고층 아파트는 대부분 불이 켜져 있어 매우 화려하다. 전기사정이 나쁘다던데 이곳은 예외인가?
남포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밤하늘 별만 반짝일 뿐 지나가는 차량 한 대 없이 조명이라곤 오직 우리의 자동차 라이트뿐이다. 저 별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이렇게 대립하는 것이 부질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이곳은 북한 땅, 갈 수 없고 올 수 없는 땅에서 밤하늘을 보는 것이 형언하기 힘든 짜릿함과 막막함을 느끼게 했다.
중간에 차를 세워 길가에서 소변을 봤다. 모두 남자라서 가능했고 남북이 같이 노상방뇨하는 것에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남포 숙소에 돌아와 하역상황을 전달받고 그날의 일과를 마쳤다. 모레쯤이면 하역이 완료될 거라 하는데 오늘도 정전으로 하역크레인이 몇 시간 멈췄다고 한다.
남포의 밤이 깊어가고 별들은 반짝이고 있다.(3화 중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