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웅 Sep 16. 2023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1)

G선상의 아리아

◆ 입대 그리고 G선상의 아리아

79년 釜馬사태를 거쳐 얼마 후 10․26 사건은 驚天動地였다. 내가 태어나 몇 년 후부터 그때까지 대통령은 오직 박정희였다. 그가 서거했다.

이튿날 학교에 가니 당연 휴교령이 내려졌고 군인들이 교문을 지키고 있다. 친구의 자취방에 여럿 모여 안갯 속에 갇힌 미래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다.

80년 민주화의 봄, 진정한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세상이 맑게 변하고 살기 좋아지고 부유한 선진국이 되는 줄 알았다.

서울역 앞의 격렬한 민주화 시위, 최루탄, 그러나 3김의 분열은 신군부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激動의 시대~~

이덕화 주연(전두환 역)의 제5공화국에선 이때 신군부의 수뇌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장면이 나온다. 위기가 기회로 변한다.

그해 6월 13일, 23살의 청년은 머리를 빡빡 민 채 다른 입소 장병들과 줄지어 논산훈련소를 향해 가고 있다. 

부대 인근 민가에선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애절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아, 이 노래는 어제 다방에서 친구들과 들은 노래인데,,

그 前해부터 '창밖의 여자'는 대단한 히트곡이었고 조용필의 시대가 열렸다.

훈련소 부근의 아이들이 건빵 달라고 쫓아온다.

아직 군인이 되기도 전인데 웬 건빵?

훈련소 담벼락엔 '접근 시 발포'라는 무서운 경고문이 큼지막하게 페인팅되어 있고 경계병이 진짜 총(?)을 든 채 엄숙하게 서 있다.

입소식이 끝나고 수백 명의 장병들은 부대편성을 하는 기간병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쪼개져 나갔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친구, 지인들이 다 흩어지고 만다.

소대편성 후 군복과 군화로 갈아 신고 민간복은 집에 소포로 보냈다.

계급장 없는 군복,,,

첫날 점심 내무반,

오래 사용해 거칠어진 플라스틱 배식판에 몇 가지 반찬과 된장국이 주어진다.

된장국은 집에서 먹던 것과는 맛이 너무 다르다.

밍숭 하면서 냄새도 좋지 않고, 거의 남겼다.

내무반장인지 병장 한 명이 들어와 같이 점심을 먹는데 그는 국에 라면수프를 넣어서 먹는다. 나도 저걸 조금만 넣으면 좋겠는데~라는 불가능한, 과도한 희망을 잠시 해보았다.

오후에 공수부대 상사가 와서 입대장병을 모두 모아놓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훈련강도와 군기가 높아 고달프기로 유명한 공수부대, 그러나 남자가 한번 해 볼만할 것 같다,. 사회에서 맺힌 한(?)을 풀어볼까?

손을 들까 말까 몇 번이고 망설인다.

수백 명 중 아주 몇 명이 지원한다.

많은 사람이 지원하면 군중심리가 작용하여 나도 지원했을 텐데 지원자가 극소수인 걸 보니 아무래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저녁은 훈련소 생활 안내, 정신교육 등이었던 것 같다.

오후 9시 내무 점호 끝내고 잠자리에 눕는다.

소등하고, 약한 불빛아래 40여 명이 한 공간에 누워있다.

모두 누워서 무슨 생각들 할까? 이 낯선 곳 논산벌에 와서,,,

불과 엊저녁만 해도 도시의 민간인이었는데 지금 이곳에 와 있는 나,

내가 나인가? 진짜 군인이 되는 건가? 앞으로 32개월의 시간을?

음악이 흐른다. 고요한 旋律, 듣기에 따라 비장하고, 우아하며 영혼을 감싸주는 음악이, 음악이 흐른다. 차분한 여성아나운서의 멘트 '장병 여러분,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와 함께(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곡은 바흐의 ' G선상의 아리아'였다.)

울컥 오늘 이전의 일들이 생각난다.

어제저녁 음악다방에서 친구들과 12시 통금 전 '올드랭사인'을 끝으로 헤어졌는데,

아침에 천안역까지 따라와 눈물 흘리던 가엾은 어머니~

음악은 추억과 회한을 불러왔지만 한편으론  '그래, 잘해보자, 누구나 와야 할 군대, 있는 동안,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잘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정리해주기도 한 것 같다.

취침나팔소리가 울린다.

6월 한여름 밤, 23살 청춘의 영혼은 달빛 타고 그렇게 잠이 들어간다,


◆ 한 달간의 논산훈련소 마치고 성남으로 가다. 

한 달 훈련 끝에 하찮아 보이던 작대기 하나 계급장을 달고, 막 입소한 신병들을 보니 상대적 우월감이 생겼다. 

퇴소 전날 兵科부여가 있다. 헌병으로 차출되었다. 군기 세다는 병과인데 걱정보다 설렘이 더 컸던 것은 어릴 때 보던 헌병의 모습이 멋진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 그래서 좋아했다.

퇴소 저녁, 한 달간 같이 했던 기간병, 소대장, 중대장의 환송을 받으며 따블백을 맨 채 훈련소에서 논산 연무대 기차역으로 도보 이동한다. 

용산까지 가는 군용 열차를 타는 것이며 그런 이동도 작전의 범주에 포함되는지 밤에 이뤄졌다. 

한국 땅인데도 군용 열차로 컴컴한 밤에 이동하니 멀리 異域에 와 있는 것 같다. 

용산역에는 다음 날 꼭두새벽에 도착했으리라. 

용산역 앞에 있는 용사의 집에서 허술한 요기를 하고 어떻게, 몇 명이 갔는지 성남으로 갔다. 

성남에 있는 육군종합행정학교(지금은 충북 영동에 소재),

여긴 헌병, 軍宗, 재정 등 특수병과에 대해 교육하는 곳이며 두 달간의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된다. 일종의 전문교육, 심화교육인 셈이다. 

처음 이곳의 군기는 논산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했다. 

경상도 사투리의 뻐덩니 김중사, 음침하게 생긴 羅중사, 귀공자 스타일이면서 약 180cm의 키, 80kg 정도의 김하사,,,

이들은 첫날부터 존재감만으로도 공포감을 주었다. 

기선제압, 군기확립을 위해 첫날부터 뻐덩니 김중사는 누가 실수했는지 나오라 해 그의 전매특허 번개빵을 선보였다. 

한 손으로 처음엔 서서히 양쪽 뺨을 갈기다가 순간 번개처럼 이십여 차례 갈기는 묘기 같은 광경이지만 맞는 사람의 인격은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서 일과는 오전에 이론수업, 오후엔 훈련이다. 

강의내용은 별 기억나는 게 없다. 아마 범죄심리, 사례, 간단한 형사법이었던 것 같고, 오후 훈련은 검문검색, 순찰, 진압, 포박술 등이다. 

교관들은 의도적으로 군기가 빠졌다며 종종 얼차려를 시도했다. 

제일 힘든 게 목봉체조,

전신주 같은 통나무를 7~8명씩 한 조를 이뤄 양쪽 어깨에서 어깨로 이동하는 체조 아닌 체조이다. 키가 안 맞거나 대열 중 누군가 요령 피우면 너무나 힘들어진다. 형벌 수준이다. 

영상에서 삼청교육대 훈련 장면에 목봉체조 장면이 단골로 나온다. 

고된 얼차려 끝난 후 합창을 시키기도 했다. 

어머니 은혜,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그러면 땀에, 눈물에, 콧물에 참 가관이다. 그때의 어머니는 이 세상 가없는 사랑과 인자함, 안식처를 주시는 정녕 어머니이다.

점차 논산훈련소보다 자유가 많아졌다. 

그만큼 짬밥이 쌓여서일까?

행정학교 옆에는 육군교도소와 공수부대가 있으며 당시 육군교도소에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감돼 있다고 했다. 

12․12 사태에서 신군부에 체포되어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囹圄의 몸이 된 것이다. 

참 어수선한 그해였다. 김재규 사형, 김대중 사형선고, 김영삼․김종필 정계은퇴 선언, 민주화시위, 전두환대통령 취임, 오일쇼크, 마이너스 경제성장, 예금금리 25%, 물가상승률 수십 프로, 

저녁이면 하기식을 하는데 어느 날 연병장에 흘러나오는 국군의 방송 중 “떠오르는 민족의 태양이신 전두환 장군”이란 부분에서 북한 방송인가? 귀를 의심했고, 정국은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

해질 무렵이면 간혹 공수부대의 낙하훈련 구경도 신기했다. 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인간꽃송이가 활짝 만개하며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온다.

저들이 참 대단한 군인이고, 적진에 목숨 걸고 들어가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 진정 애국군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휴일에는 어김없이 행정학교 내의 교회나 절을 찾았다. 신앙과는 무관했다.

교회 가면 초코파이와 두유를 주고, 절에 가면 고추장에 야채 넣은 비빔밥을 준다. 

Maslow의 5단계 욕구 중 1단계 생리적 욕구가 아닐까? 

생존과 식욕의 단계였다. 

헌병하사관 교육생들이 입소한단다. 이들도 논산에서 이곳으로 오는 것이다. 

구내식당에서 점심 먹고 있는데 그들이 들어오고 있다. 

아마 막 도착해 식당으로 온 것 같다. 

그런데,

초중고 동창이고 같은 날 입대한 친구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다. 

반가웠지만, 눈길이 마주쳤지만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 교과일정이 달라 행정학교에서 만날 수 없었고 그가 군단 헌병대 하사관으로 있어 간혹 移監할 일이 있을 때 보았다. 

이 친구는 동창회 총무 등 매우 활동적이었고 고향의 읍장을 하던 중 낙상 사고로 걷지 못해 재활치료에 전념했건만 회복이 안되자 그 우울과 고난을 못 견뎌 몇 년 전 생을 마감하고 만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나의 상심은 컸지만 지금 이 땅에 살아있는 현실이 축복이라는, 어쩌면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1화 끝)

작가의 이전글 일본이야기(2화)-그들의 양면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