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덕통사고가 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내 삶에 큰 시련이 닥쳤다. 당시 나는 회사와 일에 거의 모든 일상과 에너지를 올인했다. 서른에는 그 회사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최대한 오래 그 회사를 다니는 게 입사할 때 나의 목표였다. 그런데 일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절반은 성공이라 믿었고, 아니 심지어 대성공이었다. 마지막 한 고비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을 무렵, 정말 너무나도 이상하게, 그래, 실패하고 말았다. 좌절이라기보다 혼란스러웠다. 내 노력과 성의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미움이 싹텄다. 오해했다. 아닌가 그때 내가 믿는 진실이 맞나. 아직도 모르겠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조급한 나와는 다르게 어른들은 기다리라고만 했다. 모든 말과 행동들이 내 앞길을 방해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생의 의지를 잃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난 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난 그 회사와 일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일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그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보다 더 기뻐했던 건 아버지였다. 나는 인문대 졸업생이다. 취업도 어려울 줄 알았던 내가 업계에서 나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는 것에 아버지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토요일에 퇴근하고 네 시간 반을 당신이 운전을 해서 서울로 한 달음에 오실 만큼. 그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찍은 엄마와 아버지 사진을 애써 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의’ 트로피 같은 딸이 되고 싶었다. K-장녀의 흔한 서사지만 어린 시절 바빴던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의 곁에 자리를 지켰던 것은 나였다. 그랬기 때문에 입사 후 아버지의 오버스러운 환희를 볼 때 나는 좀 짜증이 났다. 그런데 생의 바닥에서 가장 많이 떠오른 게 아버지라는 사실이 정말 아이러니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회사를 어떻게든 다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홧김에 쿠팡으로 번개탄을 주문했다. 그냥 이렇게 사느니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려는데 문 앞에 택배 박스를 발견했다. 로켓 배송의 신속함에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호기롭게 주문할 땐 언제고 배송이 도착하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3일을 그 택배 박스를 뜯지도 않고 문 앞에 놔뒀다. 3일 후 문 앞에 [복도 앞 적치물 제거 요망]이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박스를 집으로 들고 들어와 잘 보이는 곳에 놔뒀다. 그리고 침대에 대충 누워서 이것저것 검색했다. 오피스텔에서 그러면 뭐 기물파손 죄니 뭐니 이따위를 검색했다. 마치 핑계를 찾으려는 것처럼. 한동안 그 번개탄은 꽤 오랫동안 방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굳이 좋은 말이 나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엄마와. 엄마는 갱년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엄마도 아버지에 서운한 일이 있었는데, 나 역시 에너지가 없어서 매정하게 대해버린 것이다. 그때 내 모습은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들이 보기에도 위태로웠던 것 같다. 친구와 카톡을 하다 답장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야 다행이다. 나 너 큰일 난 줄 알았어]라고 보낼 정도로.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거의 업계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할 때 받은 스트레스도 쉽게 공감해 주고 그렇게 일 얘기를 여가시간에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고 나서 그 친구들을 만나기가 부담스러웠고, 부끄러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깨어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화가 몸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아버지가 꼬박꼬박 보내주는 영양제를 일부러 먹지 않았다.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긴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자르기도 했다. 더 노력할 힘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밥 먹듯이 하던 야근도 싫었다. 퇴근 시간 1분 전에 신발을 갈아 신고 나가버렸다. 최악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잘 살아있지 않는가. 나는 이 최악의 시간을 덕질로 건너왔다. 타이밍이 꽤 좋았던 것이 그때 구교환 붐이 일었다. <D.P>에서 좋은 아버지 군번 역할로 군필자들의 마음을 훔쳤으며, <모가디슈>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대중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고 덕심이 활활 타오를 장작이 많았다. CF 메이킹 영상, 잡지 인터뷰가 쏟아지고 영화관에서는 구교환 기획전으로 그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상영해 주었다. 그런 떡밥들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청룡 영화상> 후보에 그가 오른 것이다. 레드카펫과 시상식 장소를 보니 회사와 가까웠다. 퇴근 후에 여의도 CGV에서 구교환, 이옥섭의 <연애다큐>를 보고, 시상식 전에 자전거를 타고 그 장소에 가봤다. 대포카메라, 사다리까지 가지고 온 사람들이 즐비했다. 운 좋게 펜스에서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는데 MC인 김혜수, 유연석 배우를 시작으로 레드카펫이 시작되었다. 후보가 하나, 둘 지나가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그는 다소 긴장되었는지 다른 배우들에 비해 2배의 속도로 레드카펫을 지나갔지만, 너무 신기하고 벅찼다. 휴대폰 배터리가 별로 없어서 급하게 트위터에 그의 영상을 올렸다. 알고 보니 기자들보다도 빨리 올린 터라 반응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날 구교환은 인기스타상을 수상했고 그때의 리액션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날의 구교환을 본 기억은 내 상황과는 별개로 기분 좋고 벅찼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트위터에는 '스페이스'라는 기능이 있다. 스페이스는 음성 채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누구나 호스트가 될 수 있고, 호스트가 스페이스를 열면 자유롭게 입장해 발언권을 얻고 대화를 할 수 있다. 호기심에 스페이스를 들어가서 최애의 팬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왜 좋은지, 그의 필모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보면 어느새 새벽이 되어 있었다. 한두 시간 자고 출근을 해서 졸음을 참으며 업무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매일 그런 날들을 보내다 보니 새벽 스페이스 고정멤버들이 생기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친밀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 그렇게 밤새서 했던 대화들의 대부분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내 상황을 전혀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날씨 얘기, 끼니 잘 챙기라는 따뜻한 말을 주고받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렇게 한두 달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나는 덕질로 숨어서 최악의 시간을 따뜻한 기억들로 채울 수 있었다. 숨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