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독스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를 볼 때엔 주의할 점이 있다.
최대한 타임 패러독스를 신경 쓰지 않으면서 봐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해결한 영화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모순을 무시하고 스토리의 완성도에 집중한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가서 나를 죽인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는가?'
매체들에선 여기에 대한 해결법으로 세 가지 정도를 제시한다.
1. 다중 우주론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새로운 시간선이 생겨난다는 설정이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도 '그곳의 나'와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해결한다.
과거의 나를 없애도 나는 없어지지 않는다.
둘은 외모만 같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2. 결정론
과거로 돌아가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설정이다.
아마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을 죽이려다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 또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을 죽이려다 실패한다.
이게 무한히 반복되는 식의 결말이다.
3. 스토리
시간여행을 주제표현을 위한 매개로만 사용했다면 시간역설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를 없애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며 나아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주로 묘사한다.
보통 사랑, 힐링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
이 중 시간여행을 주요 주제로 다루면서 모순 없이 스토리적 완성도까지 뽑아낼 방법은 결정론이 유일하다.
시간을 통제했다고 생각한 인간이 아무 결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결말은 기분 나쁘도록 재밌다.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이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을 제치고 편의점 왕국의 적통으로 계승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의점 간 거리제한이 있는데,
교회는 거리제한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 대형교회 바로 맞은편에 대형교회가 있다.
교회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런 행태가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이름 옆에 작게 쓰인 글자를 살펴보자.
두 교회는 각자 다른 교단일 것이다.
천주교는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정통 깊은 교단이다.
그 신앙의 바탕을 실천에 두고 있다.
물론 믿음을 저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께서 부여한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여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개신교는 이런 천주교에 반발하여 파생했다.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발생한다.
어쩌면 선행도 특정 계층의 전유물일지도 모른다.
특히 옛날 사람들에겐 더 그랬을 것이다.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우월감에 빠져 빈곤층을 무시하는 엘리트들이 많아졌고,
그런 엘리트들을 신 앞에 겸손하라며 비판하던 사람이 루터와 칼뱅이다.
이들을 따르던 교회가 주류가 되어 현재의 개신교가 됐다.
이들은 모두가 평등하게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개신교에서 다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등등... 끝이 없는 듯 나뉜다.
장로교는 믿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감리교는 실천을 다시 강조한다.
모든 교단의 발단은 그 시대상황에 맞춰보면 각자의 적절한 논리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사람들의 각광을 얻지 못하고 사장됐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이단상담소 3회 차.
3-1 이단교리파훼.
신천지에서 들은 마지막 수업내용은 확증편향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가르침에 반발한 이유는 확증편향이라고 가르쳤다.
당시 유대인과 로마 기득권 모두가 예수를 견제했기 때문에, 꼭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특정할 필요가 없다.
이번에도 저번 시간과 같은 강사가 들어왔다.
이단 교리 논파에 열정적인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흥이 오른다.
나에게 씨에 대한 말을 신천지에서 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나무를 하나 그려줬는데
이런 나무다.
여기에 어떤 씨(말씀)를 뿌리냐에 따라 다른 나무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구절을 두 곳 읊어줬다.
예레미야 31:27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다"
마태복음 13:24~"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여기서 신천지는 사람의 씨 - 하나님의 말씀, 짐승의 씨 - 사단의 말로 비유하여 해석한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예수 - 유대인 과의 대립은 예언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천지의 주장을 총 요약한 표이다.
신천지는 예수 활동 당시를 초림시대, 현재를 재림시대라고 주장하는데,
굳이 예수와 대립된 관계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 특정한 이유는 그들이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현재 기성교회와의 연결성을 강하게 맺기 위함이다.
그리고 핵심이 중요하다.
가라지를 키우는 기성교회로부터 신도를 추수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할을 맡는 것을 추수꾼이라고 한다.
기성교회로 신천지임을 숨기고 들어가 사람들을 설득하고 신천지 신도로 만든다.
마태복음 13장 39절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종말의 때가 다가왔으니 어서 가라지 속에서 좋은 씨를, 비진리 속에서 참된 신도를 가져와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천사라 믿고 파괴적 전도활동도 서슴지 않게 된다.
추수꾼은 성경 속 예언을 내가 이루고 있다는 상당한 성취감을 얻을 것이다.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이 아닐 수 없다.
수업을 마치기 전 강사에게 물었다.
"제가 모임장이 다니는 교회를 알고 있는데, 교회에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모임장이 다니는 교회를 사실대로 말했을진 모르지만 알려줄 순 있겠죠"
애매모호한 태도.
열정적인 강의와 다르게, 막상 대응을 제안했더니 미적지근하다.
이들의 주목적도 이단퇴치는 아니라는 의심을 안 하기가 힘들다.
3-2 성경교육
저번과 다른 강사가 들어왔다.
눈빛에서 상당히 압도당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절실하게 진리를 알려주고 싶어 하는,
약간은 미쳐있는 사람의,
그런 눈빛이다.
수업은 온갖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설득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 하나.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나에게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지 묻길래 선행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답했다.
"율법을 지키고 선행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을까요?"
강사는 답답하고도 절실한 느낌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감정이 너무 많이 담겨있어 내가 반응하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심지어 조금 울먹이면서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구약시대 사람들도 예수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대속 : 남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거나 속죄함.
'예수탄생 이전의 사람들도 예수로 구원을 받았다고?'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약속된 예수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찾아볼까요?.."
구약 성경을 15군데 정도 연속해서 찾고 읽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수의 대속을 약속하고 예언한 구절이라고 설명했다.
딱 절반만 이해했다.
'언젠가 신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거야'
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까지 이해했다.
그러나 아직 대속이 벌어지지 않았다.
죄를 없애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데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성경에서 구원은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조건 1. 예수의 대속이라는 사건이 벌어짐
조건 2. 예수의 대속을 믿음
강사는 '조건 2.예수의 대속을 믿음' 만 있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 보였다.
내가 반문했다.
"그럼 예수는 왜 온 거예요?"
강사는 흠칫 놀라며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투로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예수의 대속을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면, 그냥 영원히 예정된 미래로 남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잖아요. 딱히 예수가 오지 않았어도, 언젠가 온다는 생각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강사는 예수는 약속을 지키는 분이며,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는 대답을 했다.
"예수가 오지 않아도, 올 거라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니 구원을 하러 오신 건 아니죠"
강사는 언젠가 벌어질 일이 그때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연히 벌어졌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연이 개신교에서 인정하는 개념인가?'
계속해서 인과를 따져 물었다.
죄를 지우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 죄가 지워지는지.
사건이 벌어지기 전인데 어떻게 그 사건에 의한 결과가 일어나는지.
강사는 성경의 예언 구절만 반복해서 찾아주며 답변을 대신했다.
이 때는 대략 30군데도 넘는 성경구절을 찾고 읽었다.
최대한 논리에 맞게 이해를 해보자면 이렇다.
신은 시간개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은 인간의 생각이다.
우리는 예수를 중심에 두고 아무렇게나 쓴 개연성 없는 각본의 일부다.
이 정도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였다.
신의 무결성이 깨지지만 이렇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신의 구원에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초라한 결말이다.
이 날은 수요일이었다.
두 번째 강사는 내게 저녁 수요예배의 참석의사를 물었고 나는 좋다고 답했다.
다만 그때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아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며 때우면 좋을 시간이었다.
나는 강사에게 혼자 먹을 적당한 식당을 물었고 강사는 직접 식당후문까지 안내했다.
"우리 교회 근처 유일한 식당입니다"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으니 다른 손님이 들어왔고 인사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들어보니 식당주인은 교회 간사로 활동 중인 듯했다.
식당 추천을 하랬더니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추천했다.
나라면 잇속으로 느낄지를 염려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정문으로 나와보니 식당가가 펼쳐졌다.
강사의 식당 추천사에는 괄호가 붙어야 한다.
"우리 교회 근처 (우리 교회사람이 운영하는) 유일한 식당입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우선 식당에서 꽤 많이 벗어났다.
해당 교회 사람들에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를 지나 상가 근처로 가니 한 아저씨가 쓰레기를 줍고 있다.
적당히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릴 생각을 하던 내가 부끄러워 최소한 이 근처는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떤 빌라촌 건물 앞에 작게 구비된 양철 재떨이를 발견하고서야 식후여정이 끝날 수 있었다.
시간은 아직도 30분 넘게 남아있었지만 딱히 방황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교회로 돌아가야 했다.
멀리서도 교회의 종탑이 보였다.
누구든지 교회를 쉽게 찾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일까.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싶은 심리가 담긴 실물일까.
교회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가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 인사를 하고 심지어 나에게도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무안함을 견디기 힘들어 오늘 내용을 정리할 겸 차로 돌아갔다.
이 교회를 찾기 위해 지도 어플을 열었을 때 읽었던 리뷰가 있다.
교회 주변 불법 주차 문제로 주민들의 반발이 있는 듯했다.
교인 수에 비해 확보된 주차자리가 적은 교회로 보인다.
나는 첫 상담 때 교회 앞 지상주차장에 차를 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차에서 조용히 노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교회신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차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대화인 듯했다.
"내버려 둬~ 새 신자잖아"
“너는 이럴 때만 '새'자를 붙이냐"
아무래도 주차위치가 잘못된 것 같다.
그렇지만 여기 말고 다른 주차자리도 모른다.
길가에 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2시간 반가량의 수업도 이미 들은 터라 지친 마음에 그대로 차를 끌고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카페가 있다.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다.
이곳에서 글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 어느새 내 루틴이 됐다.
사장 옆자리에서 글을 한창 적고 있는데,
한편에 자리 잡은 교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떻게 주일에 그 잠깐 차 대놓은 걸 신고를 할 수가 있어 인색하게"
나는 그 말을 똑같이 들었는지 친구에게 눈짓으로 확인했다.
친구와 함께 조용히 웃으며 소리 없는 조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