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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Aug 08. 2024

여름 바캉스 1

캔커피

커피 믹스를 즐겨 먹다 건강에 좋지 않다 하여 원두커피로만 마신 지가 꽤 된다.

  여느 때처럼 커피를 내려 먹다, 불쑥 아득히 먼 옛날의 여름 바캉스가 떠오르며, 그때마다 꼭 챙겼던 캔커피가 생각났다. '레쓰비' 캔커피...


 름이 되면 우리는 늘 어딘가로 떠났다.

 어느 해는 영암에서 진도로, 이어  완도, 청산도, 보길도,  그리고  저 땅끝 마을 해남까지 갔다가, 또  어느 해는 용인 민속촌으로 출발하여 춘천 남이섬으로, 이어 양양 낙산사, 속초 설악산, 강원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3박 4일, 4박 5일씩 작열하는 태양 아래 어찌 그렇게도 잘 다녔지 모르겠다. 사는 고장인 대구에서 참 멀리까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양양 낙산사에서



 행 계획은 나도 세운 적 있지만, 대체로 공기업 다니던 셋째 시누 남편이 세웠다.

  시누 남편은 긍정적인 마인드에 소탈하고, 성실하신 분인데, 처가 일에 항상 손발 벗고 나섰고, 여름 바캉스 계획도 그 부분 중 하나였다.

  시누 남편의 휴가 계획은 매해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있어서, 살고 있던 답답한 내륙 분지를 벗어날 생각에, 여름만 되면 새로운 여행지에 설레며 기다리곤 했었다.


 누 남편이 여행지역을 선정하여 들러보아야 할 관광지나 유명한 음식점  개괄적인 계획을 짜면, 부부가 손발 박자가 맞게 시누는 여행 일정에 맞춰 열심히 먹거리를 장만하였다.

  

  시누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다. 가정학과 출신 아니랄까 봐 전형적인 가정 살림살이가 취미인 여성인데, 요즘이야 워낙에 요리 프로그램도 많고 먹방도 많아 서양 요리든 동남아 요리든 뭐 특별날 게 없다만, 30여 년 전 결혼해 와서 시누가 만들어 준 낯선 음식에 입이 뻥 뚫렸더랬다.  

 

  당시 시누는 대구서 학군 일등인 지역에서 소문난 요리 선생으로부터 소그룹으로 요리를 배우고 있었는데,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 동남아 요리들을 배우고 있어서 집에는 페퍼민트, 바질 등 온갖 양념 재료와 소스들을 가득히 두고 있었고, 그리고  요리에 어울리는 그릇들을 그릇장에 예쁘게 진열해두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여러 요리 프로그램들에서 선보이는 많은 음식들을 일찌감치 맛볼 수 있었다.

 

   아무튼 알뜰살뜰한 전업 주부인 데다 요리하기 좋아하며, 또 맛난 요리사인 시누는  바캉스 시즌이 되면, 그 역량을 한껏 발휘하였다.

   소고기, 돼지고기, 상추  깻잎 등 온갖  찬거리 장만에다 간장, 참기름, 깨소금, 된장, 고추장 등 조미료며, 온갖 부자재 등을 잔뜩 장만하여, 숙소의 아침저녁을 풍요롭게 즐겁게 해 주었다. 점심은 대체로 그 지역의 맛집을 탐방하여 해결하였으나 그렇게 아침과 저녁은 준비해 간 재료들로 주로 해 먹었다.

  

  지금은  아주 오지가 아닌 다음에는 시골 요소요소마다  마트나 편의점이 있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마트나 편의점은 큰 읍내 정도에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번 여행 갈 때면 커다란 아이스 박스에 찬거리와 부자재를 잔뜩 사서 트렁크가 꽉꽉 차도록 싣고 다녔다.

  특히나 알뜰한 시누여서 최대한 해 먹자는 주의이다 보니, 짐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직장 생활하는 데다 아직은 설익은  가정 주부이던 입장으로선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시누는 준비를 많이 하였다.

 그렇게 준비를 잔뜩 하는 시누에게 '뭘 준비할까요' 라고 물은 말에 늘 내게는 음료수만 챙기면 된다고 하여 어느새 여름 바캉스 음료수는 내 담당이 되었고,  나는 유일한 그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했다. 시누의 준비량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일이었기에.


  여행 하루 전날 대형 마트에 가서 음료수 코너에 음료수만 사면 되었다. 그때마다 내가 고른 음료수가 꼭 있었으니 커피였고,  그 브랜드가 지금도 여전히 시판 중인 '레쓰비' 캔커피였다.


떠나는 사람 수에 맞춰 한 사람 당 하루 한 개씩, 어머니,  아버님, 셋째 시누 내외, 시누 딸, 동서 내외와 조카, 결혼 안 한 막내 시누, 그리고 우리 식구 둘.... 이렇게 대체로 11명이  차 3대로 움직였다


  큰 시누 내외와 둘째 시누 내외는 여름 바캉스에는 동행한 적이 거의 없다.  

 조카 다섯인 큰 시누와 조카 둘인 둘째 시누는 조카들이 번갈아 가며 중, 고등학교 학생으로 수험생이 되다 보니 빠지게 되었고, 우리 집은 딸애와 나만 주로 동행을 하였다. 남편은 사업으로 바빠서 또는 기운 사업으로 기분 안 난다는  핑계 대며  여름 바캉스는 거의 빠졌다.

  그렇거나 말거나  맏며느리로서 어른들 여름휴가를 잘 챙겨드려야 한다는 의무감과 딸아이의 다양한 지역에 대한 경험을 위해, 그러나  무엇보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 즐거워서 열심히도 여름 바캉스를 다녔다.  


 아무튼 그래서 대체로 여름 바캉스 철마다  '레쓰비'를 보통 40~50개 정도를 샀다. 아이스박스에 생수와 딸애와 조카들이 먹을 음료수와  캔커피를 가득 채우면 나의 여행 준비는 끝났다.

 

  출발 당일대체로 아침 먹은 후  아버님댁 아파트 단지에 모여 출발하였는데, 날씨 얘기며 준비 내용 등 여행 분위기로 흥겨운 가운데, 시누 남편, 시동생, 막내 시누 등 베스트 드라이버들이 운전석에 앉고, 차 시동을 걸면, 시원한  레쓰비 하나씩을 쭉 돌렸고, 우리는 드디어 출발하였다.



바캉스 마다 챙겼던 캔커피


  솜구름 두둥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의 싱그런 산과 들을 가로지르며 가다가,  2시간 정도 되는 지점의 휴게소에 들르곤 했다.

  화장실도 들르지만, 여행지에서 휴소 들르지 않으면  프 없는 라면 아니가. 적어도 시누 남편과 내게는 휴게소는 그런 곳이었다.

  별로 하는 것은 없다. 그냥  갇힌 차속에서  벗어 나는 게 좋고,  알감자, 꼬치, 핫도그 등 여러 스낵들 기웃기웃하는 것도 좋고,  분주히 또는 느긋하게 연인, 부부, 가족,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형형색색의 오가는 사람들 구경 또한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렇게  이리 저리 빙빙 돌고 있노라면, 셋째 시누가 모두를 불러 서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사온 김밥이나 햄버거를 내놓는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주부의 알뜰 경제학과 아침잠 없는 부지런함과 타고난 요리 실력의 결합으로 내놓은 김밥과 햄버거는 들꼬들한 라면이나 매점 음식들을 사 먹을 기회를 뺏기는 서운함이 들게도 했지만, 그 맛은 정말이지 황홀한 지경이어서, 아쉬운 마음에 산 콜라로도 서운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유유자적 각자 또는 모여 충분한 휴게 시간을 갖고선 다시 느긋하게 목표지를 향해 달려갔다.


  리는 그렇게 여름이면 곳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20~3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60대에서 70대였던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인이 되셨고, 10대이던 셋째 시누 딸내미는 40대가 되어 10대의 아들내미를 두고 있고,  시누 내외는 그 아들 내미 키워준다고 맞벌이하고 있는 딸내미와 합가 하여 서울로 이사가, 서울 사람 된 지 어언 10년에 가깝고, 당시 유년이던 딸애와 동서네 조카는 30대가 되어, 서울서 취업하여 살고 있다.

 리고 당시 30대, 40대 짱짱했던 셋째 시누 내외, 막내 시누, 동서 내외, 우리 내외는 모두 그 당시 어머님, 아버님 연령대인  60대, 70대가 되어 있다.


  아득히 먼 그 시절이 과연 있었던가 싶게 꿈같이 느껴진다.

강렬한 여름 햇살아래  빨간 배롱나무 줄지어선 가로수를 휙휙 내달렸던, 그 여름날의 바캉스가 전설처럼 여겨진다.

 

  고슴도치섬 숲 테이블에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며, 청산도에서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채근하는 시동생의 음성이 엊그제 일처럼 귀에 생생하고, 월출산 아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 나무 그늘에 돗자리 깔고 앉아 점심 차려 먹는 어른들, 그 너머로 딸아이가 그네를 타며 노래를 하던 장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두 전설럼 여겨진다.


                         춘천 고슴도치섬에서




 '레쓰비'

여름 바캉스 때마다 한아름 챙겼던 캔커피.

즐겨 내려먹는 블루마운틴을 마시다가, 불현듯 떠오른

달콤 쌉싸래한 캔커피..


 추억이 떠오르며 한달음에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3캔을 사 왔다.

  당을 걱정하는 나이인지라, 한 번에 벌컥 마시지는 못하고,

홀짝홀짝, 떠들썩 북적였던 아득한 그 여름날들의 환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 속에 추억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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