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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Aug 10. 2024

하안거의 즐거움

근사한 여자

채 덜 말린 젖은 머리를 질끈 묶고서, 수영복 가방을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문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태양은 지글지글하고, 하얀 솜구름이 뭉게뭉게 하늘을 수놓고 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창문을 활짝 열고선,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된 노래를 튼다.


  ' I don' t love anyone the way I love you~~ '  

 ' 누구도 당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라며, , 세 번 담담히 나지막이 흥얼거린다. 


  인적 드문 조용한 과학 연구원 캠퍼스에 딸린 수영장이어서, 볼륨 한껏 높여도 누구 하나 방해할 일 없으니 맘껏 소리 높여 천천히 수영장을 빠져나온다.

 

 집까지 가는 5분 거리의 길을 최대한 천천히 간다.

 미세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대기에 파아란 하늘, 두둥실 미동도 않는 듯 떠있는 하얀 솜구름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 올려다본다.

  이즈음의 하늘은 언제나 이런 듯하고, 볼 때마다 늘 신기하고 좋다. 비록 더워 헉헉 대지만, 이 풍경만큼은 너무 좋다.

그래서 더워도 삼복더위 시즌이 가끔 좋을 때 있다.



먼지 한톨 없는 날의 푸른 하늘과 솜구름


 요즘의 루틴이 완전히 마음에 든다.

 아침 먹고 설거지하고 집 정리 좀 하고 나면 10시 경이다. 그러면 레쓰비 캔커피 경쾌하게 뚜껑 따서 홀짝이며,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서 세상사 둘러본다.


 그런 후에는 여행 관련 정보를 검색해서, 이 더위 물러난 후 떠날 지역을 물색해 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수영장 갈 시간. 수영복과 속옷, 세안제, 로션 등을 챙겨 11시 40분쯤에 집을 나와서, 수영 50분가량 하고 샤워하고 집으로 귀가하면 오후 1시 30분쯤이 된다.  



과학연구원에 딸린 종합 체육관


  수영 가방을 정리하고, 점심을 차려 tv를 켜서는  2시에 진행하는 즐겨보는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점심을 먹는다.


 점심 후에는  잠깐의 오수를 즐긴다. 오수는 대체로 30분 정도 내외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한결 정신이 맑아져 상쾌한 기분으로 책가방(책과 필기도구가 들어 있으니 책가방이라 한다)을 챙겨 아파트 단지에 있는 맘카페로 간다.


  맘카페에는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적당하게 구비되어 있고, 안쪽으로 별도의 분리된 공간에는 유아들이 놀 수 있는 여러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유아나 초등학생을 둔 젊은 엄마들이 꼬맹이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들은 놀이장에서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소리 질러대며 놀이를 하고, 엄마들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다양한 소재들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이미 30대가 되어 서울서 생활하고 있는 딸애를 둔 나는 조용히 혼자서 챙겨 온 책을 읽거나,  cnn 앱에 들어가서 희대의 정치가인 트럼프가 또 어떤 트러블을 일으켰는지, 트럼프에 맞서고 있는 해리스와의 여론 조사 결과는 어떠한 지, 자못 흥미롭고 생생한 뉴스들을 검색한다.



맘카페


  그렇게  2~3시간 여의 시간을 보낸 후에는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헬스장으로 가서 근력 운동과 요가를 다.

  격일 하루는 상체 운동, 하루는 하체 운동을 요가를 섞어 번갈아가며 하고, 수영을 못한 날에는 유산소 운동도 곁들여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7시 경이 되어 집으로 와서 저녁상을 차린다.



헬스장


  저녁을 먹고는 찬들이 떨어질 무렵인 ,  낮에는 더운 날씨 관계못하다가 좀 덜 더운 저녁 시간을 이용해 반찬들을 만든다.

   나는 내가 만든 반찬이 맛있다. 또 요리하기한다. 타고난 감각도 있데다, 주방살이 40년이니 웬만한 반찬은 뚝딱이고, 대략 감으로 조미를 해도 맛이 난다.

  

  이런저런 재료들을 꺼내 다듬고 씻으며 어느새 수영장에서 수영 삼매경에 빠져 몰아가 되듯이, 요리 삼매경에 빠져 몰아가 되어 하나, , 시간 늦은 줄 모르고  요리를 해댄다. 원래 야행성으로 오히려 밤시간에 더 생생하여 지치지 않고 만들어댄다.

    

  는 재료에 따라  오이 초고추장 무침, 가지 무침, 멸치 꽈리고추 볶음, 연근 땅콩 조림 등 3~4가지 밑반찬과 닭개장, 바지락 미역국, 언양식 불고기, 해물 동그랑 땡 등 국물류 일반요리 3~4가지 해놓으면, 시원한 냉면과 콩국수를 한 번씩 해 먹고,  외식하는 경우도 있어서 일주일 찬으로는 충분하다.


  아무튼 요즘 나의 일과는 이와 같다.

 집, 수영장, 맘카페, 헬스장을 쳇바퀴 돌듯 돌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 없이 알뜰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아 흡족하다.

  이런 흡족한 시간들은 여름 더위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너무 더워 바깥 나갈 엄두가 안나, 실내 생활로 루틴을 짜다 보니 이렇게 보내게 된 것이다. 

 래 좀 게으른 편이라, 요즘 이와 같은 살뜰한 루틴은 신기하고 기특해서 자신을 쓰담쓰담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고3 시절 어느 일요일 날, 늦잠에서 깨어났는데, 아버지께선 예비고사(요즘의 대학 수능고사)를 앞두고 있는 내가 걱정되고 답답하셨든지, 네가 망하면 잠 때문인 줄 알아라 하셨던 적이 있다.

 무슨 말씀을 저렇게 하실까 원망스러웠지만, 그 정도로 느긋한 편이.

 

  침에 잘 못 일어나고, 해야 할 것만 최소한으로, D -day에 임박해서 하는 성향인 편으로, 운동해야 한다, 근력 키워야 한다 등 얘기를 이 방송 저 방송에서 무슨 주술처럼 해대는 데도 실천 못하고, 빈둥대며 마지못해 아파트 옆으로 흐르고 있는 하천변 산책 좀 하는 게 고작이었던 몸으로선 대단한 생활의 변혁인 거다. 런 변혁은 아이러니하도 더위가 준 선물이다.


  몇 해전 이사 온 이곳은 새로 계획 건설된 신도시로, 쭉쭉 뻗어 올라간 아파트 단지와 그 주변으로는 올망졸망 4층으로 이루어진 빌라들, 그리고 중심지엔 7~9층 정도의 상가들 지런히 정렬해 있다.

  그리고 광역시마다 설치되어 있는 과학 연구원을 비롯하여 국립 과학관이나 기타 여러 연구단지들이 자리해 있고, 아파트 단지와는 거리를 좀 둔 곳에는 공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주로 비오염물질을 출하는 종류의 제조업이 입지 해 있다.

   그리고 해발고도 700m 정도 되는 높은 산이 동네와 직선거리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해 있고, 그 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가 아파트 단지 주변 100~200m 정도의 거리까지 산으로 어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전에 살았던 도심지와는 달리 조용하고, 공기 , 번잡하지 않, 무엇보다  단지 옆으로 흐르고 있는 하천과 산책길은 더없는 행복을 준다. 

  하천은 한겨울에도 얼음 아래로 졸졸 물이 흐를 정도로 유량이 많은 편인데, 그 물길 따라 산책길을 걷노라면 앞으로 옆으로 푸르른 들판과 산과 그 위로 뻥 뚫린 하늘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천 산책 끝부분 계곡 입구와 닿아져 서, 컨디션이 좋은 날엔  계을 따라 마련된 둘레길을 올라가 본다. 

  둘레 길은 계곡을 따라 30 여분 정도로 이어는데, 규모는 작지만 군데군데 표 찍듯 3개의 폭포가 있어 시원하 물 떨어 자는 장면을 연출하고, 높은 산을 주봉으로 두고 있어서 한겨울에도 계곡물이 흐르는데, 여름철이면 불어난 물이 콸콸 힘차게 달으며, 폭포는 우당탕탕 제법 겁을 먹을 만큼 큰소리를 내며 떨어지곤 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10월 하순의 계절 탓도 있었겠지만, 아파트들은 미입주한 세대가 많았고, 아직 덜 개발되어 빈 땅이 많아 전반적으로 황량하고,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슨 유배지에라도 온듯한 느낌이 들어 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원주택에 살고 싶은 꿈을 못 이룬 대신, 르른 산천과 필요한 기능들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고루 갖춘  역의 전원 풍경과 쾌적함과 고요함 너무 좋다.


  아무튼 무더위로 외부와 단절한 채 산천으로 에워싸인 조용한 이 고장에서 집, 수영장, 맘카페, 헬스장만 기계처럼 오가며 완벽하게 하안거를 하고 있다.

  

  이 땡볕에도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지, 지인 한 명은 사흘이 멀다 않고 카톡 프로필에 새로운 장소서  얼굴 내밀고 찍은 사진을 올린다.

  불타는 대지 속으로 나다닐 수 있는 용기도, 건강도 대단해 보이지만 부럽지는 않다.  

 비교 안 는 나만의 즐거움 속에 빠져 있으니까. 

 완벽한 하안거를 즐기고 있으니까.


  고요히 루틴을 따라 건강 챙기고, 마음 챙기고, 지식 충전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꽤나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 같아, 왠지 근사한 여자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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