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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n 10. 2021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

엄마도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친한 언니 영과 전화통화가 닿았다. 베트남에 있을 때 많이 의지하고 지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언니와 통화를 하고 나면 수화기 너머로 언니의 긍정 에테르가 넘어와 퍼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호탕한 웃음이 좋았고, 남들 사는 만큼, 남들 사는 대로 아둥바둥 사는 걸 피하지 않았다. 살면서 생기는 자질구레한 돈 문제나 걱정, 하루의 고됨을 모두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버리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 가져다 놓아도 살아날 것만 같은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 번은 언니한테 기대 없이 한국 오면 뭐할꺼에요라고 물어봤는데 정 안되면 택시기사라도 할까봐라는 엉뚱한 대답을 해서 참 언니답다 싶어서 웃었다.


사교육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던 언니도 첫째가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보니 달라진 것 같았다. 몇달 째 이어지는 락다운과 휴교에 지친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거진 일년을 학교에 가지 못 하고 집에만 있는 아이들에게 언니의 여유도 경계에 몰린 것 같았다.

집에만 있다 뒤쳐지면 어떻게해라고 걱정하는 언니에게 에이, 크면서 결국엔 다 따라잡게 될거에요라는 판에 박힌 대답을 찍어냈다.

아마 언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의 아이였고 누군가의 그런 지극한 걱정과 보살핌을 받아본 적 있었으니. 지금은 걱정하는 이런 일들이 후에 그랬었지하고 넘기고 말 것이다.


"근데 나는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하잖아"


언니가 덧붙인 말에 아차, 싶었다. 나는 그저 먼 발치서 남의 삶을 조망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사교육에 덧붙여진 치맛바람과 국영수에 대한 집착이라는 부정적인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것은 나였다.

언니의 걱정은 단순히 성적 부진이 아닌 많은 것을 안고 있었다.

남들이 다 아는 것을 자신만 모르는 것 같아 의기 소침해질 아이, 그게 다른 일로도 옮을까 걱정인 마음.

자식을 위해 남들이 YES하는 세상에서 NO를 기꺼이 외쳐줄 수 있는 부모지만 모든 일에 부모가 관여해줄 수는 없다. 아이의 인생은 앞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아갈 것이고 내가 모르는 음지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일에 부모가 챙겨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물이 사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쉽게 극성이다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이의 세상에 엄마가 소속되는 것이 아니 듯, 아이마다 개성이 다르 듯 엄마도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들이다. 모두 다른 서사를 가진 삶이란 걸 말이다.

자영업을 하는 내 친구 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십대를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 나니 그 삶은 더욱 치열해졌지만, 엄마도 시어머니도 주변의 모두가 윤의 삶만 더욱 치열해진 것이 당연하게 생각했다. 엄마니까.

윤의 푸념을 듣고 윤의 하루를 떠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등교 시키고 가게 오픈을 한다. 아이의 등교시간 즈음 맞춰 온 알바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1시 반에 아이의 하교길을 챙기러 간다. 점심을 거른 윤은 아이를 기다리며 차 안에서 빵이나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랠 수 밖에 없다. 아이를 태우고 태권도 학원으로 대려다 주고 가게에 온다. 아이가 가고 싶다고 졸랐던 피아노 학원까지 연달아 마치기를 기다리다 다시 아이를 픽업해서 한글 교실에 데려다 주고 온다.

아이와 함께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면 어느 덧 밤이다.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준비하고 잠자리에 눕혔지만 아직도 윤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늘 내일 아침까지 당겨 준비를 해야 하루치의 일이 마무리 된다.


윤의 푸념을 듣고도 내 대답은 꼭 한글 교실까지 보내야해? 였다.

그제서야 윤은 털어놓았다. 새로 옮긴 유치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직 정확히 몰라 사물함을 못 찾아 더운데도 오전 시간 내내 땀을 흘리며 코트를 입고 있어야 했던 아이의 이야기를 말이다. 아이는 더운 것보다 자신만 자신의 이름을 읽지 못 한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 더 싫었던 것이다.

그 때 또 비난의 화살은 내 친구에게 돌아왔다. 아이가 부족한 것이 마치 엄마가 미처 채워주지 못 한것이라는 듯.


아침부터 밤까지 가게를 열어야 하는 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 쉽게 그래도 아이가 중요하지, 지금 이 시기는 두 번 다시 안 온다고 말한다. 그래도 쉽게 가게를 접으란 소리는 하지 못 한다. 그 정도로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윤에게 뚜렷한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너는 잘하고 있어, 좋은 엄마야.


사람들이 말하는 모성애, 어머니의 도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이와 엄마의 인생을 쉽게 저울질하고 어머니의 도리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들.

늘 의문이다. 그렇게 숭고하고 애틋한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삶이 자신 어머니의 삶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


교육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이 그래도 교육이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로 

요즘 엄마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서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꼭 해야해요, 아이 보내 놓고 필라테스 가야하고. 아이 보내 놓고 커피 마셔야 하고, 라고 말한 것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는 말이었는지,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엄마들의 이기심을 이용한다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걸 이용해 교육업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었는지, 아이 엄마가 된 내게 어떤 공감을 얻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들으면서도 편치 않았지만 지금 다시 곱씹어 보니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이 꼭 엄마들의 이기심때문이라는 말같아서 편향된 시선에 불쾌해졌다.


모두가 헬렌 켈러의 설리반같은 엄마가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훌륭하지 않은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Writer _ 똔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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