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기르고 나서야 깨닫는 사실이 있다.
아기는 한없이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아기의 똥 기저귀를 치우다 보면 사춘기 시절 원망 섞인 마음으로 이럴 거면 왜 낳았어라고 내뱉은 말이 얼마나 철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 한 생명의 신비를 직접 몸소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입을 벌리는 새처럼 본능적으로 젖을 찾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퉁퉁 부운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아이의 입을 벌려 물어주어야 했다. 젖을 물리고 무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장은 직선과 같아서 먹으면 바로 쌓다. 아직 미성숙한 소화 기관 때문에 젖을 물리고 나면 아기를 세워 트름을 시켜줘야만 했다.
젖이 아닌 다른 것을 먹는 과정도 비슷한 과정이 필요했다. 덩어리를 소화시킬 수 없는 아기의 위에 쌀미음이나 퓌레같이 덩어리가 거의 없는 것들을 먹이며 음식을 먹는 연습을 시작했다. 액체가 손톱 반 만한 알갱이 크기가 될 때까지 반년이 걸렸다. 아기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젖을 끊기 위해 밤마다 아기의 울음을 방관해야 했다. 먹고 소화시키는 그 단순한 것도 연습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에 밥알을 씹어 삼키며 나 아닌 다른 이의 노력이 더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아기는 아기대로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차례로 연습해나갔다. 가만히 천장만 보고 누워있던 아기가 어느 날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쏟아내어 뒤집어 누웠다. 흔들 인형처럼 앞으로 쏟아질 듯 앉아있던 아이의 허리가 어느 순간 안정을 찾았고 배를 질질 끌던 아기가 배를 번쩍 들고 기어 다니다 어느 날 싱크대를 붙잡고 서서 한 발 한 발 아찔하게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본 나와 남편은 매 순간 올림픽 결승이라도 된 듯 물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기가 원초적인 스텝을 하나씩 완수해 나갈 때마다 수면시간은 조금씩 길어졌지만 충분히 길어지는 데 2년이 넘게 걸렸다.
2시간마다 잠을 깨던 신생아 시절엔 제발 5시간 만이라며 100일의 기적을 기다렸고(우리 아기의 경우 그 기적은 한참 후에나 왔다) 드디어 5시간을 자게 되었을 땐 언제 너와 함께 밤에 잠들었다 아침에 깨게 될까를 고대했다.
내 체력과 인내심에도 연습이 필요한 듯했다. 가끔씩 한계에 다다른 듯 무너졌다. 밤마다 어둠 속에서 젖병을 찾아 헤매다 가끔씩 참지 못 하고 아기에게 하는 소리인지 남편에게 하는 소리인지 허공에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무고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내가 30년을 철 없이 난도질했던 부모라는 이가 그저 연약한 한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밤이었다.
어느덧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 순간에도 아기가 세상에 나가기 위한 연습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수저와 포크를 쥐는 연습, 컵으로 물을 마시는 연습, 젖병을 떼는 연습, 기저귀를 떼는 연습, 혼자 자는 연습, 말을 하는 연습.
육아는 단순히 아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세상에 홀로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이 선행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많은 연습을 위해 어떤 이의 노력과 참을성이 필요했는지도.
지금 홀로 서기 위해 수 백번의 연습이 선행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