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기다림
"정원에 봄 꽃이 활짝 폈어, 혼자 보기 아깝네"
그 말이 내내 남편 마음에 얹혀 콕콕 찔렀나 보다.
찾아간 할머니네 집 정원엔 정말 봄 꽃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열린 대문으로 할머니의 생활도 함께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라고 인기척을 내자 바쁜데 뭐하러 왔어 라며 나무라는 할머니 얼굴도 피어올랐다.
눈가의 주름들도 같이 봉긋 솟아올랐다.
한동안 발길이 끊겼던 할머니의 첫째 아들이 다녀갔다 하셨다. 할머니는 어쩐지라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할머니, 외삼촌 다녀가셨다면서요?"
남편의 물음에 왜 왔는지 몰라라는 핀잔으로 대답했지만 드러나는 반가움을 숨길 순 없었다.
그 긴 기다림 동안 쌓인 할머니의 한이 창문에 서렸던 김마냥 순식간에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방, 긴 세월 자리 잡고 있던 자개장들이 뿌옇게 빛을 잃고 그 틈마다 가라앉은 먼지 사이에 사소한 마음이 껴 묵어가고 있었다. 기다림과 미움, 원망, 후회 온갖 석연찮은 감정들로 세워진 벽 사이에 앉아서, 그저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할머니를 멋대로 상상하곤 코 끝이 조금 저렸다.
할머니는 종종 내 아이를 보고 아이고 이뻐라하시다가도 저것도 크면 지 잘났다고 떠날 거야, 자식 놈들이 다 그래라며 지금에서 언젠지 모를 그 시절로 갔다 돌아오곤 하셨다.
말투에서 순식간에 할머니가 넘나든 시간 사이로 만나고 온 이는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넘치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한 때는 내 아이와 같이 무구했던 얼굴,
내가 그러했듯, 낭비되어야 진정한 젊음이란 말처럼 손에 움켜쥔 시간이 새 나가는지도 모르고 영원처럼 하루를 살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겨보고, 울고 웃고 좌절하고 지쳐 뒤돌아봤을 때 그제야 잔영처럼 사라져 가고 있는 제 엄마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내 아들도 아닌 할머니의 아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마침 아이가 나를 불렀다.
마당 한쪽에서 한쪽으로 자기만 알 수 있는 규칙으로 돌을 옮겼다. “이 것은 돌이고 이 것은 돌이 아니다”
아이의 어색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그 순수함이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됐다.
그 사이 아이 안에 나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나도 언젠가 매일 너를 기다리게 될까.
누군가 아이의 등을 먼저 밀어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을 하긴 했었는데.
“우린 내가 한 손으로 내 엄마의 손을 잡고 반대 편엔 네 손을 잡는 이어 달리기를 배울 순 없을까?”
두 돌 아이에게 말하며 응이라고 대답해 줬으면 내심 기대했다.
짐작할 수도 없지만 이제는 그 기다림을 어쩌면 나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그 사랑이 때때로 미움으로 전해지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알 것 같은 그 마음을 영원히 모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미세먼지 좋음, 푸른 하늘, 활짝 핀 봄 꽃, 라일락 향기, 할머니와 내 아이의 미소,
그리고 끊이지 않았던 웃음소리와 약간의 슬픔이 있던 일요일 오후였다.
4월의 어느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