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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n 02. 2021

출산이라는 심연으로

겁을 내는 누군가에게 겁 내지 말라고 아무리 달랜다한들 요동치는 사람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나 외에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같은 길을 걸어왔더라 하더라도 출발선에 새로 서게 된 사람에게 낯선 길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낳아 길러내고 있는 나는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는 것일까. 아직 나의 최고 속력은 내지 못한 것 같은데 나는 이미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지나왔단 건가, 불룩한 내 배를 보고 들었던 생각이다.

당시 내 기분을 비유하자면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 사람도, 마라톤의 출발선에 선 사람도 아닌, 긴 잠수를 준비하는 수영 선수에 가까웠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끝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물 밖에 남겨둔 채로.




"둘이 잘 살면 안 가져도 되지"

결혼을 하고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먹고 살 여유만 있으면 아이 갖는 게 훨씬 행복하지"

또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얼른 네가 다시 직장에 들어가야 할 텐데, 아니면 네 거라도 뭐 해야 할 텐데"

임신한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엄마의 표정은 어떠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젊은 날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엄마에게 육아란 가정이란 무엇이었을까. 다 늦어서라도 이혼을 한 것을 보니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생각이 변했거나)

엄마에게도 나와 내 동생으로 인해 상실된 것이 있음은 분명했다. 우리로 인해 행복했고 그 긴 시간을 버틸 힘이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분명했다. 단조로운 일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한데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본다는 건 지독히도 복잡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용기 내기를 망설인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임신 소식을 알렸다. 나를 뒤따라 친한 친구 또한 기쁜 소식을 이어 알렸다. 오히려 그 사실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입덧 탓도 있었지만 거의 하루 종일 무기력한 몸을 침대와 소파에 뉘이고 있었다. 태교도 하지 않았고, 임신한 내 몸을 가꾸지도 않았다. 나는 그 흔한 튼살크림도 두 통이나 사두었지만 출산까지 한 통도 다 쓰지 않았고, 보건소에서 받은 엽산도 거의 그대로였다. 임신은 내 의지로 벌어지지 않은 일과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무책임했다.

같이 임신을 한 친구들과 나 사이에 숨겨야 하는 간극이 있었다. 내가 만약 말했다면 이해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축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야 하는 나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들에게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네가 이럴 줄이야, 이다. 기적처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모성애가 생기진 않았다. 아이가 역아였기 때문에 제왕절개를 해야 했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꺼내고 싶었다. 매일 역류하는 위산과 눌린 방광 때문에 오금이 저린 몸뚱아리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아픈 허리와 골반, 부은 발도 한몫을 했다.

인생을 살다 보니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낄 때가 많다. 제왕절개를 단순히 표현하자면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낸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수술은 내 생각보다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었다.

수술 전 음모를 밀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낯선 누군가 내 음모를 민다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절차인 듯 덤덤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간호사의 사무적인 태도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수술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마취전문의, 간호사, 또 간호사, 간호사..

내 기억 속에서 최소 5명은 있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차가운 수술대의 냉기에야 배를 가르는구나가 실감이 나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치마 같은 수술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반신 마취가 안전하게 끝나자 내 가슴 위로 아래를 볼 수 없게 수건이 쳐졌고 그 아래로 수술복은 모두 제쳐졌다. 가슴을 가린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아주 선명한 정신으로. 그간의 고통이 너무했던 것인지 먹은 나이만큼 얼굴이 두꺼워진 것인지, 현실을 거부했던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은 느끼지 못했다. 내 몸이 하나의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수술실의 사람들 또한 모두 내 몸을 하나의 고쳐야 할 기계인양 세심하게 체크했다.

내 배 위로 선생님이 빨간색 소독약 같은 것을 바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수술이 시작하는구나, 두려움이 밀려왔다. 제정신인 체로 배를 갈리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무언가 물컹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간호사가 태진으로 얼굴이 가득한 아기를 안고 내게로 왔다.

아이에게 뽀뽀하시겠어요? 라고 묻는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께 네? 라고 되물었다.

아직 내 배는 열려 있고 피가 철철 흐를 텐데 불쑥 내 눈앞에 나타난 아기에게 바로 뽀뽀하시겠어요라고 묻는 이 상황이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자 나는 바로 잠이 들었고 극심한 고통과 함께 깨어났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아파요 아파요를 외쳤고 간호사는 내게 무통주사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절망적이었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리는 순간도 그다지 감동적이진 않았다. 나의 돌처럼 딱딱해진 젖가슴을 잡고 쭈글쭈글 금붕어처럼 입을 꿈벅거리는 아이를 간호사가 억지로 들이밀었고, 나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아이가 잘 못 물어서 억지로 계속 물려줘야 해요, 처음에 산모 대부분이 젖 물리기에 실패하세요, 괜찮아요"

세상의 임신과 출산엔 내가 예상치 못한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매일 병실과 신생아실을 왔다 갔다 하다 퇴원해 엄마가 있는 집에 돌아오니 살 것 같았다. 나는 산후 조리원에 가지 않았다. 주변 외국인 엄마들과 육아 정보를 공유하다 보니 필요성을 못 느껴 산후 조리원을 이용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 많은 산모들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당시 출산의 고통 이외에 내가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엄마가 필요했다. 철없게도 난 아이 엄마가 된 지금도 내가 아플 때 엄마가 필요하다. 박완서 선생님 말처럼 나 또한 죽을 때조차 엄마가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평소 모성애에 대한 집중된 조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성애는 숭고하고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태어났을 때 부여되는 성별과 같이 여성에게 당연해 내재되어있는 DNA같이 묘사되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더하여 모성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의무와 책임 또한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내게 그 당연한 것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하던 때도 있었다.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인지, 밤인지 낮인지, 심지어 겨울인지 여름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너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 낳길 잘했어?" 

아이를 낳고 수없이 받았던 질문이다. 대답은 당연히 행복해요인데 그 앞 괄호 앞에 무수히 많은 그럼에도 가 생략되어 있다.

아이를 기르는 첫 해는 극단적인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잠과의 싸움, 피로와의 싸움, 분노와의 싸움.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나면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라며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중에 아이가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에 안심되면서도 아이의 성격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가끔 내가 잡은 작은 손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가끔 그 무게가 버거울 때도 있다.

다음은 일상과의 싸움이었다. 기저귀, 두세 개의 분유병, 물휴지, 담요, 너의 쪽쪽이, 간식. 매번 필요한 것들이 더해지면서 가방은 무거워지고 아이의 몸무게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내 일상의 반경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아기보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다들 한 번도 아기였던 적이 없는 사람들만 있는 도시 같이 느껴졌다.




아이가 삶에 들어온다는 건 힘들다. 나는 나를 반쯤 포기하게 된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항상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너는 제일 늦게 결혼할 줄 알았는데, 너는 평생 아이는 안 가질지 알았는데, 가끔 친구들도 믿기지 않는 듯 말하곤 한다. 과거의 내가 보면 믿지 못하겠지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하곤 한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때의 나를 꾸짖지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지금도 아직까지도 여전히 쭈욱 그때의 내가, 아직도 온전한 나로 다 살지 못 한 삶을 갈증 내는 내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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