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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ul 20. 2021

베트남 사파에는 유령이 삽니다

아이를 낳기 전 베트남의 사파에 놀러 갔었다. 그날은 현지인들이 주로 타는 슬리핑 버스를 이용했었다.

수도 하노이에서 5-6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고행길이다. 중간에 나오는 휴게소 또한 지저분했다.

사파에 진입하면 높은 산을 빙 둘러 구불구불 꺾어 오르는 비탈길이 나타난다. 그 오르막 길에 난간 하나 없었다. 운전기사는 거칠 것 없는 속도로 버스를 몰았고 불안한 건 나뿐이었다. 모두 익숙한 듯 무심하게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아래로 보이는 사파의 절경은 이 모든 고행길을 감내할 만했다. 나는 그렇게 여행 책자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풍경은 처음 보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카페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몸을 두른 검은 치맛단과 두건 위에 자주색, 녹색, 노란색, 흰색 등 쨍한 색깔의 실들이 체크무늬로 수놓아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치맛단과 비슷한 색상의 열쇠고리와 손지갑들이 박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온니 2 달러, 바이 원 바이 원" 남자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체 책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이들은 무안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기계처럼 반복된 멘트에 별 반응이 없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를 타깃으로 돌렸다.

원래라면 미동도 하지 않았을 나인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던 것 같다. 방금 내 눈앞에서 차갑게 거절받은 아이들을 향한 얄팍한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4만동을 내고 열쇠고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카페 난간 아래 서 있던 아이들까지 새우깡을 든 사람을 발견한 공원의 비둘기처럼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 순간의 난감과 불쾌함은 여행의 첫날이 끝났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다.


"그런 거 사주지 마. 그런 거 사줘봤자 걔네한테 더 안 좋아"

전 남자 친구, 현재의 남편이 말했다. 사실 이런 불쾌감을 받은 건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혼자 여행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자주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진다. 길에 서서 지도를 보고 있다 보면 어디에 가고 싶어라고 물으며 친절하게 동행해준다던가, 무거운 짐을 끙끙대고 나르고 있으면 옮겨준다던가. 그 호의가 백 프로 순수했던 적이 아니었던 적도 있었지만. 관광객이 많이 가는 낙후된 지역일수록 더했다. 팁이라고 대놓고 요구하진 않았지만 대부분 도움에 대한 대가를 기다리며 기대의 눈빛으로 서 있던 적도 종종 있었다.

팁이 없는 문화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 접한 팁의 개념은 줘도 되고 안 줘도 되는 것인데, 그걸 강요한다면 일종의 무례나 강탈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엄청난 상술이었다. 그럴 거면 가격에 처음부터 붙여놓지 이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처음 배낭여행을 하던 대학생 때는 주머니가 얇기까지 해서 순수한 호의가 면을 뒤집어 가짜임을 드러낼 때 강탈감과 불쾌함이 더 했다.


다시 사파로 돌아가서, 여행 둘째 날은  남자 친구랑 사파 시내에서 라오 까이까지 트래킹을 하기로 계획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걸어서 40 정도, 평균보다 빠른 우리 걸음을 예상했을  그보다  걸릴 것으로 계산되었다. 호기롭게 걷다가도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길에 여기가 맞나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파 흐멍족 여자에게 물었다. 라오 까이로 가는 길이 이쪽이 맞나요. 뜨거운 햇볕에  몸을 흐몽족의 전통 천으로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발은 욕실에서 신을 법한 PVC슬리퍼였다. 흙먼지와 열기에 늘어난 것처럼 옆으로 늘어난 슬리퍼 안의 발은 하얗게 엉겨 붙은 먼지와 각질 사이로 쩍쩍 갈라져있었다. 여자가 다니는 길이 그저 매끄러운 아스팔트 길은 아니구나 싶었다. 40대일까 50대일까, 새카맣게 그을린 친근한 얼굴로 자신이 걸어가던 방향과 반대임에도 우리에게 라오 까이로 가는  좋은 길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가는 길엔 냇가도 있고  속도 지나가서  아릅답다고. 뭐든 시멘트 길에 흩뿌리는 흙먼지보다 낫지 싶었다.

길은 말처럼 아름다웠다. 구글 맵에 나 있는 메인 도로 옆의 풀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 사이로 여자가 먼저 성큼 앞섰다. 사람들이 걸음으로 만든 길이었다. 더위에 지쳐 진흙 속에서 쉬고 있는 검정 버펄로들도 마주쳤고, 길 아래로 난 흐르는 물가 사이의 돌을 밟아 건너기도 하고, 절벽처럼 끊어지는 곳 아래로는 사파의 계단식 논들이 보였다.

저기야, 아래 논 사이에 드문드문 난 집들을 가리키며 저기가 마을이야라고 여자가 친절하게 안내했다. 고맙다고 어설픈 베트남어로 인사하자 여자가 웃으며 자신은 베트남어를 못 한다고 했다.

“왜 베트남 말을 못 해요?”

“베트남 말이 필요 없어서. 영어만 해도 되거든”

“영어는 누구한테 배웠어요?”

“너희 같은 관광객들한테”

“학교는요?”

“여기 사람들은 학교 잘 안가. 돈 벌어야지. 딸 애는 하노이에 가서 공부하길 바라긴 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해서 못 했지”

“그럼 뭐해요?”

“나처럼 일하지. 애도 있고. 벌써 15살인걸”

마을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내 손을 잡아주는 여자 손이 사포처럼 거칠었다. 그만큼 표현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그토록 거칠고 딱딱한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하자 여자는 우리를 마을 어귀, 중심의 식당에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손에는 시내에서 보았던 공예품이 가득 들려 있었다.

이 지갑은 20만동, 이 파우치는 15만동, 이 열쇠고리는 5만동, 우리가 당연히 하나를 산다는 듯 무엇을 고르겠냐며 물건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녀 손에서 제일 비싼 지갑과 파우치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호의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고맙고 만족스럽기도 했고, 어쩌면 당연한 대가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 식당에서 먹었던 코카콜라와 볶음밥이 사파 여행 중 가장 맛있었다고 기억되는 음식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같은 여행객들을 위해 마을 입구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기다리는 남자들이 모여있었다.

“사파 타운까지 10만동” 당시 우리에겐 그 두 배라도 충분히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호텔 근처에 내려 이대로 여정을 끝내기 아쉬운 마음에 시내를 돌았다. 골목의 틈마다 공예품을 온몸에 두르거나 바닥에 깔아놓고 파는 여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아 이 많은 제품이 수제품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비성수기에 한낮의 더운 길에 관광객이 드물었기 때문에 어디로 눈을 돌려도 눈이 마주칠 것 같이 나를 쳐다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시선이 집중됨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에게 힐끗힐끗 건네지는 시선이 왔다갈뿐이었다. 그중 여러 번 마주친 눈 중에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여느 흐몽족과 같은 화려한 복장에 꾀죄죄한 얼굴에도 엣되 보여 많아야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평균 신장이 작은 사파 사람의 골격 때문에 더 작아 보였다. 아이 또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공예품을 내밀며 흥정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동생이냐고. 영어가 서툰 아이는 자신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엄마라고.

그 뒤로 사파 골목골목을 다니며 아이를 업거나 들쳐 메고 있는 어린 엄마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외지에서 온 우리들 뿐이었다.


실제로 그 아이가 한 말에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파, 베트남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베트남 사람들을 통해서 들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먼저 사파에 다녀온 영국인 친구는 한 남자가 자신의 12살 난 딸을 20달러만 주면 신부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혼기가 찬 사파의 남녀들이 모인다는 결혼 마켓(실제로 시장이라는 베트남 단어를 사용했다),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들은 적 있었다. 그들이 나고 자란 환경을 모르는 내가 감히 후진적이라고 폄하할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 아이의 말 또한 덤덤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파를 떠나와 지금까지 내내 뇌리에 남는 건 아이들의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너무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노동이나 육아에 의한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행복뿐 아니라 온갖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다 빠져나간 유령처럼 그 텅 빈 얼굴들이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그들은 유령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가난’이라는 표현을 사전이 아닌 실제로 체험해 본 박완서 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나는 아이들을 그저 텍스트처럼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자 그 얼굴들은 사라졌다. 밤에 다른 도시로 변하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전통 복장을 입고 광장 계단에 모여 있는 사파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한국의 이태원에 있는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 밤의 선선함과 빛에 취해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사파는 흥행하는 관광지로 떠올라 여기저기 공사판의 먼지가 자욱했다. 라오까이로 향하는 그 오솔길을 다시 찾으려고 해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밀려들어오는 자본은 다음번에 사파를 찾았을 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밤의 빛은 더욱 화려해졌고,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그 빛에 많은 유령들이 사라진 건지 그 사이에 숨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이제는 모두 사라졌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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