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나 Feb 03. 2022

평범하고 마음에 꾸욱 자국을 남기는

설날 일상

설날 아침


커튼을 치자마자 밤새 쌓인 눈으로 새하얗게 변해버린 도시의 모습이 펼쳐졌다. 도로가에 주차된 차 위로 밤에 쌓인 눈이 새하얀 설탕처럼 내려앉아 있던, 그 위로 햇살이 반짝이던 아름다운 아침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던 날이었다.


오늘 엄마가 오기로 한 날인데.

엄마 너무 힘들 것 같으면 오지마, 라고 문자를 했는데 그게 또 오지 말란 소리로 들렸는지 다음에 오겠다는 엄마의 메시지에서 읽힌 서운함은 내 아쉬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걸자 엄마는 다시 오겠다고 했고 점심때가 되어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내려서 버스를 타야 하고 내려서도 걸어야 하는 길인데 이렇게 빨리 도착한 엄마를 보니 나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외투를 벗어 내려놓자마자 엄마는 보따리상처럼 한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바로 들고 온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봉투 위로 우리 가족의 이름이 각각 쓰여진 봉투 세 개는 세뱃돈, 할머니가 직접 짠 들기름, 굴이 어찌나 싱싱한지 이가 닿자마자 톡톡 터진다는 어리굴젓, 내가 추울까봐 가져온 목도리, 예쁘게 칼집이 난 밤 한 망까지. 마술 보따리에서 나와 하나하나 식탁 위에 놓일 때마다 엄마의 각주가 붙여졌다.


엄마가 다시 일을 시작한지 6개월이 다되어 갔다. 힘들다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그만두질 못 하는 건 이곳이 아니면 나이 환갑이 다 되어가는 사람을 써줄 곳이 흔치 않다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생활의 마지막 보루에 서 있는 노병의 마음이었겠고 그런 엄마를 보는 나는 그게 내 무능력의 소치 같아 항상 마음 한 곳이 불편해졌다. 그런데 요즘 엄마가 자꾸 우리 집에 오면 틈만 나면 지갑을 열었다.

이건 이사했으니까, 이건 아이 과자값, 이건 세뱃돈 하면서 봉투를 놓고 가기도 하고 아이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고 가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이번 달에 나갈 돈이며 다음 달에 나갈 돈을 두드리며 지갑을 열까 말까 고민하다 쉽사리 열지 못 하는 내 마음이 지갑만큼 얄팍해지는 기분도 들기도 했고. 어렸을 적 엄마, 내가 커서 돈 많이 벌어다 줄게 하던 내가 서른이 넘어서도 그 말을 지키지 못했구나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마냥 싫었던 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이건 사돈어른들 꺼, 하면서 설 선물세트를 사 와 내밀었다.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났고 명절이든 뭐든 마음이야 알겠지만은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 부담스러워 이런 건 예의상이 아니라 정말로 하지 말자고, 정말 마음만 주고받자고 했던 사이였는데 뜬금없는 명절 선물이 당혹스러웠지만 이제라도 건네는 엄마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일을 하는 엄마는 늘 힘들어 보였지만 하지 않을 때, 집에만 있었을 때보다 마음은 가벼워 보였고, 통장에 생긴 여유보다 마음에 생긴 여유가 더 풍족해 보였다. 

돈을 번다는 건 뭔지, 가끔은 그 숨 막히게 어렵고 단조롭고 무거운 일이 사람을 가볍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노동은 그저 반복되는 삶의 족쇄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는 그로 인해 엄마는 자유로워졌다. 결국 혼자 두 발로 일어섰고 작지만 아담한 자신만의 방도 있으며, 주변에 떼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긴 모양이었다.


오후엔 오랜만에 아이와 셋이서 장을 보고 함께 늦은 점심을 차려 먹었다. 돌아오는 길엔 길가에 쌓인 눈을 뭉쳐 아이에게 건네주어보기도 하고, 아이는 손 위에 놓은 눈덩이가 신기한 생명체처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또 재밌는지 발자국이 나지 않은 곳만 찾아 꾹꾹 제 발도장을 누르며 돌아왔다. 아이는 처음으로 배를 깔고 새배 비슷하 게 절을 했고 할머니에게 첫 세뱃돈을 받았지만 단지 종이일 뿐, 무심하게 세뱃돈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보다는 같이 놀자고 재촉했다. 저녁이 되어 데려다준다는 말에 엄마는 화까지 내며 결국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저녁도 먹지 않고 바쁜 사위 얼굴 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설날이었다. 평범하고 마음에 꾸욱 자국을 남기는.


가지런히 정렬되어 랩핑 된 버섯들이 박스에 담겨 찬장 위 다른 박스 들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았다. 엄마 마음이 시들해지기 전에 주말엔 시댁에 버섯을 배달하러 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온 몸을 이력서 삼아 써내려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