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큰집

by AZ


추석이었으니까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 아빠는 장남이고 우리 집은 흔히 말하는 큰집이다

할머니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살았다.


결혼하지 않은 막내 삼촌이

내가 유치원 때 오토바이 사고로 장애를 얻어

할머니와 같이 우리 집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빠엄마 모두 형제가 적지 않은 편이라

명절이 되면 우리 집은 바글바글해진다.


명절 전날이면 작은 아빠네 식구들이 먼저 집에 도착한다.

여자들은 둘러앉아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음식을 하고

금세 온 집안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한다.


기본적인 음식 준비를 마치고 정리하면 저녁식사 시간이 된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정리한 후에는 명절음식 준비 2차전이 시작된다.


저녁에는

추석은 송편, 설날엔 만두를 빚는다.

어릴 땐 이것도 여자들끼리만 했는데 내가 어느 정도 컸을 때부터는 남자 사촌들이 함께 했다.

(내 사촌들은 나와 나이터울이 다 비슷하다. 그래서 같이하기 조금 쉬웠던 것 같다.)


송편이나 만두는 모두 반죽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워낙 식구가 많다 보니 항상 대용량이라

반죽하는 게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남자 형제들에게 힘 좀 보태보라고 한 게 처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촌들도 반죽이 어지간히 힘들었던 건지 온갖 도구들을 직접 사 오기도 했는데

사실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역시 손맛이 최고)


낮에는 전을 부치고 밤에는 송편이나 만두를 빚고 나면

명절 전날이 지나간다.

그리고 명절 당일엔 새벽부터 제사 준비가 한창이고

제사를 지내고 식사를 하고

일찍부터 떠들썩한 하루가 또 시작된다.


나는 여자애라 제사에는 관여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래서 굳이 나를 일찍부터 깨우진 않으셨다.


나는 명절 당일이면 부러 늦잠을 잤다.

그래봤자 8~9시엔 일어나야 했지만, 그래도 제사가 다 끝나고 아침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식구가 워낙 많다 보니 식사가 한 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보통 남자 어른들이 먼저 식사를 했고

그다음 여자 어른들이 식사를 했다.


일부러 남녀를 나눈 것은 아니다.

남자어른들 식사할 때 빈자리가 있으면 작은엄마든 나든 언니든 누구든 가서 식사를 해도 됐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식사가 끝나면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설날엔 곧 세배가 시작된다.


어릴 땐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했던 것 같은데

뭘 해도 크게 웃어주고 좋아해 주는 가족들이니 신나서 했던 것 같다.


명절 당일 점심이 지나기 시작하면 아빠 직계 형제들이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제는 아빠의 사촌들이 하나둘 집에 찾아오신다.

종종 할머니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형제, 사촌분도 찾아오셨다.


그렇게 보통 한 3~4 가족이 추가로 방문하셨는데

저녁쯤 되어 모든 방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이제는 우리가 외갓집을 갈 시간이다.


외갓집도 서울에 있어서 30분 정도면 금방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어릴 때 명절이면 장거리 이동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거라서 차를 타고 몇 시간씩 이동한다는 게 여행을 하는 것 같아 부러웠던 것 같다.


뉴스를 보면 고속도로에 차가 가득한데

사람들은 다 고속도로에 있는데 나만 집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외갓집에 가면 외삼촌들과 외할머니가 반겨주셨다.


지금은 외할머니가 안 계신다.

내게 외할머니는 작고 왜소한 체격에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하시는 참 조용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항상 본인보다 남을 배려하셨고, 자식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시는 존경할만한 분이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엄마를 보면 그때 외할머니가 종종 생각난다.

물론 외할머니가 더 마르긴 했지만 (엄마 미안)

큰 딸이라 그런가, 엄마가 나이가 들수록 외할머니랑 많이 비슷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외할머니는 내가 고3 때 돌아가셨는데,

가끔 엄마가 친할머니 때문에 아빠에게 서운할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 (너는) 엄마 있어서 좋겠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이 말을 내뱉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나도 가끔 외할머니가 그립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가 사주신 김치냉장고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쓰고 계신다.


문이 고장 나서 고정이 안되는데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걸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집엔 김치 냉장고가 2개나 있다)


외할머니는 선물을 줄 때도 항상 똑같이 주셨다.

엄마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줄 땐 이모에게도 똑같은 걸 같이 사주셨고,

언니랑 나에게도 똑같은 책상을 선물해 주셨었다.


그 책상도 어찌나 튼튼한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멀쩡 하게 사용하고 몇 년 전 겨우 정리했다.

(이제 회사 다니는 우리가 쓰기에 너무너무 큰 책상이라 고민 끝에 정리했다)


하여튼 명절 당일날 저녁엔 외갓집에 가서 또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낸다.

참고로 외갓집엔 사촌이 많은데 나를 포함해 총 9명이다.

9명의 나이터울이 고작 4살이다.

그러니까 9명 중 제일 첫째와 막내가 4살 차이라서 만나면 항상 왁자지껄 시끌벅적 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닌 건

친가 쪽보다는 외가 쪽 식구들과 더 많이 다녔다.


사촌 이야기가 나왔으니

큰오빠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다.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한참 가수들 좋아하고 연예인 좋아하는 나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수가 있었는데

참 악플과 좋지 않은 가십거리가 많았다.


그날도 외갓집에서 함께 컴퓨터를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 가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가십들을 전했다.

그리고 그래서 그 가수가 싫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말을 들은 오빠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너 그 가수 알아?

그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다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지 마.


오빠는 덤덤하지만 꽤나 단호한 어투로 말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그 가수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 어떤 가십이 있는 연예인이라도 그 가십으로 해당 연예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연예인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때 그렇게 이야기해 준 오빠가 고맙다.

(오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명절이면 어느 쪽을 가던 대식구들의 모임이라

항상 시끌벅적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이번 명절은

태어나 처음으로 식구들이 모이지 않았다.


엄마가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작은 아빠도 얼마 전 수술을 하시고, 또 작은 엄마도 다리에 깁스를 하셨어서

가장 대장인 우리 아빠가 온 가족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번 명절은 오지 말라고.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질 않는다니.


그래서 이번 명절은 어느 때보다 긴 연휴였음에도

어느 때보다도 조용한 명절이었다.


처음으로 전도 송편도 모두 구매했다.

제사도 집에서 지내지 않고 할머니할아버지 묘지에 가서 지냈다.


처음 이 결정을 했던 날 밤,

엄마 꿈에 할머니가 나왔는데

엄마는 꿈에서 밤새도록 할머니께 혼나셨다고 한다.


내심 마음이 불편하셨나 보다.

그래도 몸이 아프니 할머니도 한 번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내년, 아니 당장 돌아오는 설날에는 또 온 가족이 모여

할머니할아버지께 인사드릴 테니까.



그래도 나는 우리 집 명절이 싫지만은 않다.

음식은 좀 줄이면 좋겠고, 다 같이 조금씩 나눠서 하면 더 좋겠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수다도 떨고 얼굴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면 이렇게 모이는 게 자연스럽게 줄어들 테니까.


어릴 땐 이래저래서 싫은 게 참 많았는데,

이제는

이런 가족들이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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