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이 있는 21세기 신남성

by 배준현

기온이 오르면서 고양이와의 스킨십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나마 밤에 잘 때는 한 이불을 쓰지만 날이 다시 밝으면 서로 데면데면한다. 무릎 냥이 계절, 털 날리고 다리 저려서 귀찮을 때도 많았지만 쫌 더워졌다고 쌩하는 고양이 모습에서 서운함을 느낀다. 냥이가 주는 안락한 터치가 얄짤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바람 들어오고 볕 좋은 곳에서 고양이 혼자 웅크리고 있다. 원래 같으면 내 품에 안겨 있을 시간인데. 물론 그러다가도 비행기 소리 같은 굉음이라도 들리면 놀라서 허둥지둥 다시 나를 찾는다. 엊그제도 천둥에 놀라 하루 종일 불안해하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를 그래도 의지하긴 하나보다. 아마 찬바람 불기 전까진 고양이와의 찐한 포옹은 자주 없을 일 같다. 생각해 보면 나도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요즘 우리 고양이처럼 부모님과의 살가운 스킨십이 많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볼을 부빈다거나, 엉덩이를 토닥거린다거나. 그런 기억은 거의 그 이전에 있다. 대신 말은 많았다.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난 시시콜콜한 얘기를 모두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다.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엄마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 오히려 엄마가 더 귀찮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접촉은 줄었지만 친근한 유대감은 더 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 사는 데 스킨십도 중요하지만 만큼이나 대화도 정말 중요하다는 걸 그때 느꼈다. 물론 둘 다 많을수록 좋다. 어쨌든 말과 터치 모두 충분하면 좋겠지만 어느 하나 쉽지는 않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야기나누기에라도 정성을 들이고자 한다. 말하면서 나누는 시선도, 이야기에 담긴 감정도 모두 촉각적 반응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접촉은 그만큼 중요하다.


'접촉'하니까 프리허그도 생각난다. 낯선 사람이 거리에서 'Free Hugs'라고 쓴 큰 종이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안아주던 캠페인(?) 혹은 사회적 운동(?) 쯤으로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일회성 이벤트, 콘텐츠 소재 정도로만 활용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무료 안아주기'는 2004년 호주에서 시작됐다. '후안 만'이라는 20대 남성이 영국 방문 후 모든 인류의 비참함을 깨닫고 이런 퍼포먼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서 깊은 우울과 고립의 정서를 느꼈고, 이를 해결하고자 쇼핑몰이나 광장에서 안아주기를 시작했다. 결국 접촉 부재가 낳은 시대의 우울을 치유하기 위해 이 같은 프리허그가 유행했던 것이다. 그는 "everyone was miserable" 즉 모두가 비참하다고 말하며, 삭막한 인류의 현 상황을 되짚었다. (심지어 '레 미제라블' 속 비참한 사람들도 지금 보다는 더 많이 접촉하며 살았을 것이다.) 되려 지금보다 교류가 많았던, 그래서 지금보다는 더 인간적이었던(?) 당시 사회를 꼬집으며, 우정을 회복하고자 했던 한 청년의 사회 운동으로 프리허그를 되돌아볼 수 있다. 결국 프리허그 역시 터치 즉, 접촉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접속'은 무진장 많아졌지만 '접촉'은 줄어든 디지털 시대의 건조함도 떠올려 보게 한다.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마치 '여러분'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어쩌면 프리허그 역시 여러 분들을 위로해주고자 했던 '접촉 촉진 운동'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왠지 유효한 기분이다.


물론 인간사 스킨십만큼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먹고사는 문제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밥(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격언처럼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을 요구한다. 마치 아이에게 엄마의 가슴은 젖이면서 품이듯, 사람에게는 누구나 젖과 품이 필요하다. 충분한 식량과 충분한 안아주기의 경험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실제 많은 심리학 서적이나 정신분석 이론은 성인기의 병리적 특성을 어린 시절의 정서적 학대와 홀대에서 찾는다. 아무리 많은 영양공급과 물질적 지원이 이루어졌더라도 정서 공급의 결여나 실패는 아이의 미래에 큰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이다. 결국 가정에서의 이런 감각은 훗날 친구나 타자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신체적 성장 못지않게 정서적 성장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유년 시절, 일종의 골든 타임 시기의 안아주기 경험은 모두에게 정말 중요하다. 이건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포유류라는 같은 '류'적 존재들에게도 모두 해당한다. 해리 할로우가 했던 유명한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도 우리 포유류들의 정서적 지원, 안아주기에 대한 본능적 선호를 확인할 수 있다. 실험은 이랬다. 두 개의 가짜 모형을 설치한다. 하나는 철사로 돼 있는 엄마, 다른 하나는 천으로 돼 있는 엄마. '철사 엄마'는 우유를 제공하고, '천 엄마'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원숭이는 배가 고플 때는 철사 엄마에게 가서 우유를 먹지만, 그 시간을 제외한 대다수 시간은 부드러운 촉감을 제공하는 천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외부에서 스트레스나 충격을 줄 때도 마찬가지로 천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마치 천둥소리에 놀란 내 고양이처럼) 결국 젖을 주는 엄마도 중요하지만 품을 제공하는 엄마의 역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젖도 생존에 필수지만 품도 마찬가지로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는 훗날 애착이 인간 발달과 생존에 중요하다는 '애착 이론'의 토대가 된다. 같은 집밥이라도 먹는 내내 엄마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때랑, 혼자 반찬 뚜껑 열고 먹는 건 정서적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타지에서 홀로 지낼 때, 집에서 온 반찬을 정리할 때 느끼는 왠지 모를 서러움은 어쩌면 모두 다 '품'의 부재를 느껴서 일지도 모르겠다.


접촉은 줄었어도 말이라도 늘면 좋으련만, 요즘은 그것마저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안팎으로 스몰토크를 할 곳도 마땅치 않다. 가정에서는 저마다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고, 상점이나 음식점은 주문을 이행하고 수행하는 기계들 장소 같다. 입력하는 사람, 출력하는 사람. 딱 그 정도로 역할이 분담돼 있다. 주문-제공 외에는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아니 발생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작은 돌발(?) 상황에도 사람들은 무척 예민해진다. 누군가 카페에 들어와 빈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않고, 직원에게 다이렉트로 주문한다면 그것마저도 사람들의 예의 주시 대상이 된다. (심지어 보험은 다이렉트가 더 싼데. 물론 그 다이렉트가 아니긴 하다.) 사람에게 요청하면 더 빠를 일도, 기계의 매뉴얼에 따라 하나하나 입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음성보다는 텍스트 위주의 대화, 표정보다는 이모티콘, 인사보다는 스크린 터치가 소통의 주요 도구로 자리 한지 오래다. 이런 시대의 감각 앞에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대상은 점차 스마트 기기와 키오스크 혹은 A.I로 국한될 것 같다. 그래서 '품'을 잃어가는 동시대 사람들이 달달함과 폭식이라는 '젖'에만 더욱 몰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역으로 혈당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결국 내가 먹는 밥의 양도 곱절로 늘었는데 같은 이유가 아닐까? 바야흐로 과식하기 좋은 시대다.


산책하다 보면 가끔 인형 파는 가게나 캐릭터 숍이 눈에 들어온다. 카카오프렌즈샵이나 라인 스토어 같은 가게들이다. 매장이 북적이진 않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방문한다. 주로 여성과 아이들, 외국인이 대부분이다. 간혹 여자 친구를 따라온 남성들도 보인다. 매장에는 큰 캐릭터 인형이 있고, 사람들은 차례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나도 몇 번 가봤지만 내 스타일은 영 아니다. 일단 캐릭터 상품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과잉 감정이나 가짜 감정을 내걸고 있는 메신저 이모티콘을 봐도 내 지갑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 쓸데없는 인형, 베개 용도 말고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인형을 돈 주고 산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귀여워서 사나? 아니면 인기 캐릭터라서 사나? 차라리 쿠션이나 베개를 사지.' 난 단순히 시각적, 실용적 기준으로만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인형 사는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내가 우연히 동대문에서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갈색 빛이 나는, 꼬리가 특히 귀여운 강아지 인형이다. 그때 알았다. 인형을 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촉감, 부드러운 터치 때문이라고. 인형은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만지는 것이었다. 시각적 판단이 최종 심급이 아니라 촉각이 가미된 공감각의 유려한 조합이 인형이 가진 매력이었던 것이다. 애착인형처럼 함께 한다는 느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형이 주는 보드라운 감촉이다. 그래서 요즘 같은 대과식의 시대, 또 '품'이 부족한 사람들은 '천 엄마' 같은 인형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어른 남성들. 유치하다 생각 말고 인형을 구매하는 여성과 아이들의 정서적 본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남성들도 비싸고 이상한 인형(?)에 눈을 돌린다. 그 인형까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안아주기의 경험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생존의 필수적 요소라고 할 때 우리 모두는 인형을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젖과 꿀뿐만 아니라 품이 있는 시대를 위해서라도.


기온이 오르는 요즘 같은 계절, 나도 더 이상 고양이 품만을 기다릴 순 없다.


<명랑소년 인형구입기 끝>

이전 22화우애 좋은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