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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현 Oct 16. 2024

끝까지 변화 거부한 북한의 마지막은 ‘가난’

유튜브를 뒤적이던 중 한 영상을 보게 됐다. 한 국가 수장이 우리나라 대사에 던진 말을 보도한 뉴스였다.


‘존경하는 대사님. 자국은 양국에 이익이 되는 협력 관계로 복귀할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 국가인 우리나라에 이 말을 던진 인물은 누굴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친서방 세력에 선 국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지난해 12월 6일 신임 대사 제정식에 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사를 콕 집어 한 말이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레닌·스탈린·브레주네프로 대변된 공산주의 발상국인 러시아(옛 소련)의 국가 수장이 우리나라에 이런 말을 건넨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와 러시아가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협력관계를 다진 역사는 길지 않다. 노태우 정부 시절 북방외교를 통해 공산국가와 외교 접점을 넓혀가던 시기 소련에도 개혁개방을 주창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등장했다.


공산국가와 수교를 통해 국제사회로 나오려는 우리나라와 서방세계와 접점을 넓혀 경제난을 탈출하려는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0년 양국은 공식 수교 관계를 맺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수교 원칙을 합의했다. 정전협정 체결 후 40여년 만에 우리나라가 공산국가와 수교를 맺은 것이다.


기세를 몰아간 노태우 정부는 다른 공산 핵심 축인 중국과도 수교했다. 수교 전 양국 교역량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황이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내부서도 수교에 대한 반발 여론은 적거나 없다시피 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 관계는 정전협정 후만 봐도 좋지 못하다.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을 비롯 북한에 수 차례 차관을 제공하고 채무를 변제해줬다. 여러 기술은 물론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핵 기술도 옛 소련인 러시아가 제공해줬다.


공산국가와 수교하고 대외 접점을 넓혀가던 1991년 북한과 동시 가입하기 전엔 유엔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러시아가 완강히 반대한 이유가 컸다.


중국과 관계는 더 좋지 못하다. 625 전쟁 당시 장사 상륙 작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을 거듭하던 우리나라는 압록·두만강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때 중국으로 건너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 군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을 전투에 투입시킨다. 중국군에 의해 눈앞에 둔 통일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것이다.


북한은 과거 중국과 혈맹관계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정전협정 후 북한 재건 사업에 참여한 중국 인민해방군이 임무를 마치고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김일성이 직접 마중을 나가며 고마움을 전하고 악수를 건넸을 정도다.


이랬던 관계가 틀어진 건 소련과 중국이 개혁개방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서기장이 된 후 개혁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실시했다. 공산당 회의선 공개적으로 ‘자유 언론을 이용해 국민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소련 국가 수장으론 이례적으로 현장 시찰도 자주 나갔고 한 시민이 ‘당신은 우리와 가까이 하며 소통해야 합니다’고 말하자 바로 앞에 다가와 ‘어떻게 이보다 더 가까이 하란 말이냐’는 농담을 건넸다.


민주화 바람이 불던 시절 동유럽 연방 국가를 시찰했는데 한 시민이 ‘권리보단 독립’이라는 팻말을 들어보이자 ‘소련 연방을 떠나고 싶냐’고 직접 물었고 ‘예’라고 답하자 ‘이 문제에 대해 심각히 고려해봤냐’고 재차 묻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유엔 총회 연단에 선 고르바초프는 거듭 개혁개방을 강조하며 소련이 국제사회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동유럽 주둔 소련군 감축과 아프가니스탄 철군도 단행하며 국제사회의 불신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는 핵탄두를 포함한 핵전력 전폐에 대해 논의했고 중거리 핵전력 전폐조약(INF)도 체결했다.


중국은 어떨까.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을 몰아내고 주석에 오른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로 대비된 개혁개방정책을 펼쳤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논리다.


상하이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영국·포르투갈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마카오·홍콩 반환을 이끌어냈다. 홍콩 반환 당시 중국은 영국에 ‘50년 체제보상안’을 제시했다. 반환 후 50년간 홍콩 자본주의에 중국이 간섭하지 않겠단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50년이 아니라 100년 후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만일 바꾸더라도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것이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처럼 국제사회 불신을 잠재우고 개혁개방을 통해 미래를 향한 점진적 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북한은 어땠을까. 2008년 대한민국 60년이란 주제로 방영된 KBS 다큐에 출연한 마커스 놀랜드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소련 붕괴 후 북한 행보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이나 중유럽, 동유럽이 했던 변화를 이루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탈북한 김덕흥 전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도 KBS 다큐에 출연하며 당시 북한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다.


‘개혁개방 이전엔 공산국가로부터 물자를 들여와 임·가공한 후 일부분을 대금으로 보내주는 방식으로 교류를 했다. 개혁개방 후부턴 공산국가들이 임·가공한 물자 대신 외화를 요구했다. 즉석서 물품 대금을 지급하란 것이다. 이를 지급할 만한 외화가 북한엔 없었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경제가 무너져 내렸다.’


외화가 다급해진 북한은 일본을 찾아갔다. 김일성이 직접 일본에 건너가 자민당 막후 실력자 가네마루 신을 만났다. 양국간 국교 수립안과 식민지 배상금 문제를 논의했고 수십억 달러의 배상금 지급안도 논의됐다. 그러나 배상금 지급은 미국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어제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로 도로 일부를 폭파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후 마련된 남북간 교류 통로가 완전히 끊어졌다. 김정은은 직접 외제차를 몰고 와 폭파 현장을 시찰했다. 더는 우리나라와 교류·협력하지 않겠단 뜻이다.


2018년 평양남북정상회담 후 비핵화 의지를 다지고 북미정상회담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비핵화 관련 논의를 이어간 김정은이 왜 이렇게 돌변한 걸까.


2000년 615 정상회담을 이끈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 김홍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북한의 태도 돌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엔 제재 하에서도 가능한 것들은 다 시도하고 일부는 인도적 이유와 남북관계 특수성을 들어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재개 등에 대한 노력을 더 과감히 했어야 한다.’


여러 경제적 지원 실행이 지지부진해지자 협력 가치가 없다 판단했단 논리다.


우리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세계 변화 흐름을 거역하며 고립의 길로 들어선 북한에게 남은 건 극심한 가난이다.


지난 7월 압록강 유역서 발생한 대홍수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김정은은 현장을 시찰하며 폐허가 된 농토와 농지를 보며 간부들을 크게 다그쳤다. 일부 간부가 총살됐단 보도도 나왔다. 대재난이 발생했음에도 이를 복구하지 못한 당국에 대해 북한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단 보도도 나오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극심한 자금난으로 우간다와 앙골라 대사관을 공식폐쇄했다. 스페인 대사관과 홍콩 총영사관에도 철수 통보를 했다. 홍콩 총영사관은 북한 외화벌이 및 물품 조달처로 서방과 연결고리 역할을 한 중요 경제 요충지다.


혈맹관계인 중국과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다. 김정은은 내부 간부들에 ‘중국 당국자 앞에서 기죽은 모습 보이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중 수교 75주년 기념 축전선 ‘존경하는’ 수식어도 빠졌다. 왕야쥔 주북 중국대사는 북한 정권수립 76주년 기념행사에도 불참했다. 사유는 휴가였다.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 대교 현판도 철거됐다.


러시아 관계 이상 기류도 여전하다. 지난 9월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한국을 한반도 문제 해결의 중요한 참가자로 간주한다’며 ‘서울의 파트너들은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을 제고해야 한다’며 양국 관계 회복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산국가·혈맹관계 역사를 지닌 이들이 북한보다 우리나라와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건 ‘경제적 이익 여부’에 있어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월등히 낫단 판단이 작용했을 거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검토한단 보도가 나오자 러시아 당국자들은 강력 반발했다. 양국 관계가 파탄날 수도 있다며 하지 말 것을 엄중히 요청했다.


미국과 동맹을 맺고 동북아 국가 중 일본과 함께 친서방 세력을 구축 중인 우리나라에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까지도 협력의 손을 내미는 이유는 뭘까.


내 생각·추리론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북한에 돈이 없어 우리나라와 협력 관계를 다지는 게 미래지향적이라 판단했단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일부 기득권만을 위한 폐쇄·공포정치만 강조한 북한에게 남은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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