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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현 Oct 06. 2024

일반 모임과 외교의 차이

최근엔 많이 안 잡고 있지만 2주 전까지만 해도 1주에 기업 관계자와 미팅을 최소 3번 이상 할 만큼 바쁘게 사람들을 만났다.


이름만 들어도 기업 총수가 누군지, 얼마나 큰지 초중고생도 다 아는 대기업 관계자를 만날 땐 나도 모르게 속에서 ‘긴장’이 흐른다. 국내 4대 그룹 관계자를 만날 땐 더더욱 그렇다.


그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뭘 나누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주변에 간혹 있다. 동년배 친구나 대학 동기를 만나면 간혹 ‘그분들과 뭘 얘기하냐’, ‘단독 거리 캐내냐’며 궁금하단 반응을 보였다.


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며 근래에 무슨 일 없는지, 회사 내부적으로 분위기는 어떤지 얘기하는 게 거의 전부라고 답한다. 경영진이 사법리스크에 처했거나 재무적으로 많이 안 좋단 보도가 나오면 밥 먹으며 간혹 한 두 마디 던지는 게 전부라는 말도 덧붙인다.


답을 들은 친구·동기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신기하단 반응과 ‘별 것 아니네’란 반응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별 것 아니네’란 반응이 많다.


나도 그랬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교에 대해 ‘감히 범잡을 수 없는’, ‘무결점의 완벽한 과정으로 이뤄진 것’이란 시각을 갖고 있다. 그 많은 파이와 국민 생존권이 걸릴 수 있는 문제인 만큼 과정도 완벽할 거란 생각이다. 대학생 시절 외교 과목을 심층적으로 공부하기 전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행정·정치외교 분야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대학교 도서관서 관련한 많은 책을 접했다. 시험 성적도 그렇고 관련 지식을 사회서 써먹기 위해선 더 깊이 공부하는 게 필요하단 생각에서다.


나는 아직도 이 책을 집 서재에 보관하며 틈날 때마다 보곤 한다. 프레드리크 스탠턴 저자의 위대한 협상. 세계사를 뒤흔든 8개의 협정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서술돼 있다.


책 겉표지서부터 알 수 있듯 이 책엔 오늘날 장년층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세계 거물급 정치인들이 나온다. 반백년 가까이 이어진 냉전시대를 끝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소련 개혁·개방을 이끈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책 표지에 나온다.


책에 나온 이들의 협상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과 무결점’과는 거리가 멀다. 맛배기로 책에 나온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레이캬비크 협상 과정 일부를 말하면 더 이해가 갈 것이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핵무기 감축을 위해 벌인 담판이다. 중장거리 미사일 폐기도 회담서 논의됐다.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에 스타워즈라 불린 전략방위구상(SDI) 실전배치 포기를 요구한다. 이 말을 들은 레이건은 ‘SDI는 내가 (미국) 국민에게 약속한 건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냐’며 거절한다. 고르바초프는 ‘각하 결정으로 우리는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며 재차 SDI 포기를 요구하지만 레이건은 끝내 이를 거절했고 보좌진과 함께 레이캬비크 회담장서 철수한다.


레이건이 외투를 입고 회담장을 나서려 하자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을 붙잡으며 다시 얘기를 하자 요청한다. 레이건은 더 얘기할 게 없다며 그대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다.


무언가 비슷한 상황이 그려지지 않나. A라는 사람이 B가 제시한 요구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리를 뜨려 하자 A가 B를 붙잡으며 다시 얘기를 하자는 상황이 연상될 것이다. 잠시 카페서 휴식을 취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이 얘기를 하다 잘 맞지 않아 한 사람이 나가려 하자 다른 사람이 그를 붙잡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많이 접하는 풍경이다.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 배웠던 러-일 전쟁 직후 체결된 포츠머스 협정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안됐다’는 마음까지 든다.


러시아·일본 양국 외교관들은 테오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중재로 포츠머스서 휴전 협정을 진행한다.


당시 러시아 외교관은 비테고 일본 외교관은 고무라다. 고무라는 조선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지휘한 우리에겐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인물이다.


패전국 러시아의 외교관 비테는 고무라로부터 휴전의 대가로 사할린 반도 전역과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일본에 넘기라는 무리한 요구안을 받는다.


비테는 중재국 미국의 고위 당국자를 찾아가 일본 요구 수준을 낮추는데 협조해 달라 요청한다. 테니스장서 테니스를 치며 휴식을 취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일본 설득을 읍소하는 등 ‘굴욕을 감수한 로비’를 계속한다.


마침내 고무라와 비테는 협상 타결을 위한 마지막 협상을 포츠머스서 진행한다. 사할린 반도 전체 중 북위 50도 이남 영토만을 할양한다는 러시아 요구안을 고무라는 끝까지 반대한다.


이때 비테는 고무라가 보는 바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수 분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비테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고무라는 “일본은 사할린 북위 50도 이북 영토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러시아 요구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거나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많은 협상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많이 접하는 ‘심리·명분싸움’으로 진행된다 봐도 무방하다.


특정 국가가 100을 가져갈 수 있는 상황에도 심리·명분싸움서 밀려 50만 갖고가거나 아예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가 외교를 ‘저 먼 세상 그들만의 완벽한 과정’이라 볼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다.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이 외국 수장ㆍ당국자와 논의하는 걸 우리만의 시각으로 균형있게 바라보며 '저걸 왜 저렇게 논의하지', '저기서 우리가 좀더 요구해도 될텐데'라는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교회서 청년들과 만나며 수많은 얘기가 오고가는 걸 본다.


서로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며 자신이 하는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그 과정서 충돌한 이해관계를 좋게 풀어나가려는 그들을 볼 땐 허구한 날 감정싸움만 하고 끝까지 본인 생각과 이념을 밀고 나가는 ‘답답한 그들’보다 백배 천배 낫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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