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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Mar 17. 2022

운동회날 경기보다 더 기다려졌던 이 시간

소소한 금기(?)를 꺠트리는 이 시간

 어머니는 아침부터 분주히 나의 머리를 땋고 계셨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또 보고, 낯선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체육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잘 늘어나지도 않고 까끌거리는 하얀 티셔츠에 파란색 반바지. 그 당시 나는 분홍색 운동화를 좋아했기에 그야말로 제각각인 차림이었다. 그날은 책가방 없이 어머니와 할머니가 쥐어준 용돈을 바지 주머니에 고이 넣고서 학교로 향했다.

     

 스피커가 좋지 않아 노랫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탁하게 흘러나왔다. 운동회 날 아침이면 준비운동으로 항상 국민체조를 했다. 체육 선생님은 강단에 올라 노랫소리에 맞추어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셨다. 그러나 그도 어지간히 따분한 듯 표정은 늘 건조했다. 나는 키가 작았던 터라 늘 맨 앞자리에 섰다. 덕분에 아주 가까이서 그를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제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운동장에 빼곡히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은 제각기 동작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나는 주로 오래 달리기에 나갔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운동을 못 하는 편이었다.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그냥 못 했다. 달리기도 매번 꼴찌를 하니 계주나 단거리 달리기는 고사하고, 속도보다는 지구력을 요구하는 오래 달리기도 소질이 없었다. 그런 내가 오래 달리기에 나간다니. 운동회 종목에는 달리기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서너 명이서 통나무 따위를 안고 합을 맞추어 전환점을 도는 종목도 있었고, 네 명이서 넓은 천의 각 모서리를 잡고 공을 튕기는 종목도 있었다. 아주 짧은 거리를 달려가 박에 콩주머니를 마구 던져 터트리는 종목도 있었다―아마 이건 딱 한번 해본 것 같다―. 그 밖에도 다양한 종목이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굳이 오래 달리기에 나갔는가? 순전히 물러 터진 성격 탓이었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한 데다가 낯가림도 많았다. 그래서 어느 종목에 누가 나갈지 정하는 시간에 선뜻 ‘나 저거 할래!’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딱히 흥미 있는 종목을 품고 있지도 않았으나. 그렇게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남는 자리에 내가 들어가곤 했다. 어차피 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꼴찌를 하더라도 부끄러움은 잠시뿐이다. 실력과 등수를 떠나 나는 그냥 운동회가 즐거웠으니까.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전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어른들이 하나 둘 짐을 들고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한 손에는 도시락, 다른 한 손에는 돗자리. 모두 같은 짐이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난 울창한 나뭇길에 형형색색 돗자리가 펼쳐졌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눈이 바빠졌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있나, 도시락으로 무얼 싸오셨을까. 나도 짧은 다리로 운동장을 휘저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찾았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왠지 모를 쾌감이 밀려들었다. 평소 같으면 막 4교시를 끝내고 줄줄이 급식실로 내려가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는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다 못해 이 시간에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구나 싶었다. 운동회는 그 쳇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루의 시간이었다. 배고픔을 느꼈어도 도시락 메뉴가 김밥이냐 김치볶음밥이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가족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달리기 꼴찌 했다!"


 아주 해맑게 외치며 동그란 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어머니는 흙먼지에 꼬질꼬질해진 내 뺨을 쓸어주셨다. 할머니는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도시락통을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도시락을 다 비우고 나면 다시 똑같은 차림새의 아이들 속에 휩쓸리겠지. 그래서 이 시간은 더 소중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운동회가 유독 따듯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다같이 쳇바퀴를 벗어나 저마다 훈훈함 머금은 돗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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