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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과 도마 안중근

뤼순의 겨울, 조국을 품다

by GOLDRAGON

중국은 늘 가까운 듯 멀었다.

나는 20대 시절 유럽을 한 달 넘게 여행하며 나름에 많은 도시의 향기와 그 나라의 정취를 느껴보았지만, 정작 한반도의 국경을 맞댄 중국은 한 번도 발을 딛지 못한 곳이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었던 어느 평일 오후, 행정복지센터의 동료 주사님이 중국 여행을 다녀오신 후 다롄에서 사 온 대추과자 한 봉지를 나눠주셨고, 그 작은 과자는 내게 예상치 못한 시간 여행의 문을 열어주었다.

다롄 현지의 대추+호두과자

"그 도시에는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생을 마감한 감옥이 있어요. 뤼순 감옥이라고, 그대로 보존돼 있죠."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 어딘가에 고요하게 파문을 일으켰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는 하얼빈 역이라는 걸 나도 안다.
그런데 왜 하얼빈에서 그 멀고 먼 뤼순까지 그를 끌고 갔을까?
나는 그 질문을 붙잡고 고민을 해보았다.


난 관련된 자료와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답은 간단하지 않았다.

일본은 이토의 죽음을 처리하면서 자신들이 문명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키고자 했고, 그 결과 안중근 의사를 식민지 땅, 그리고 일본식 재판이 가능한 뤼순 감옥으로 이송한 것이다.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가 관할한 지역이었고 일본이 직접적인 치안권과 사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으로 재판과 수형 처리를 일본이 주도적으로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단순한 복수가 아닌, 세계 앞에 드러낸 '절차의 연극'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지만, 내가 새삼스레 진정 놀랐던 건, 그의 어머니였다.

하얀 수의를 직접 지어 아들에게 보내며,
"사내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했던 그 말.
슬픔을 내면화한 품위, 그 어떤 정치적 언어보다 강한 신념의 언어였다.
나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통곡이 아니라, 당당함과 자부심으로 감쌌다.
그 한마디에, 나라와 신념, 그리고 부모의 사랑까지 모두 담겨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아들, 안중근.

나는 그를 교과서 속 영웅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는 한국. 일본. 중국이 연합하여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자고 말했고,
감옥 안에서도 재판정에서도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했던 열일곱 동지들과의 기억을 끝까지 지켰다.

그런 그의 단단한 생을 생각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안중근은 과연 온전한가?"
이토를 죽인 인물, 순국한 독립투사라는 표제 아래,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생략해 버린 건 아닐까.
그가 사냥을 즐기던 청년이었다는 것, 책을 쓰고 강연을 준비하며 한 민족의 내일을 고민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후대의 생명으로 이어지길 바랐다는 그 염원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여행이란, 종종 예고 없이 시작된다.

마트 가는 길에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 소보루빵의 추억처럼,
때로는 '대추과자' 하나가 먼 길을 열어준다.
나는 아직 다롄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다롄은 내 마음의 길목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고, 그 사람의 철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그저 삶을 소비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그의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가, 다시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느낀다.
기억은 늘, 돌아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침묵 속에서 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2부. 안중근 의사는 과연 '독립운동가' 혹은 '의사'(義士)인가 '테러리스트' 또는 '범죄자'인가. 그걸 바라보는 국제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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