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km의 꿈, 지금은 현실의 마운드에서 힘차게 '삶'을 던진다
어느 이른 오전, 센터에서의 평범한 하루.
한 회원이 러닝머신에 올라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스포츠 채널 어디예요?"
나도 함께 리모컨을 돌리며 채널을 찾아주던 중, 그 회원이 갑자기 외쳤다.
"어, 거기! 거깁니다."
화면에는 LG 트윈스와 상대 팀의 전날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었다.
하지만 낯선 이름의 선수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몇몇만이 겨우 익숙했다.
나는 멈춰 서서 한참을 그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문득,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야구'라는 이름의 감정이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를 스포츠광이라 하진 않지만, 대중 스포츠에는 폭넓은 관심이 있다.
그중에서도 야구는 내게 단연 특별한 존재다.
유치원 시절, 나는 야구에 푹 빠져 있었다.
야구공보다 먼저 손에 쥔 것은 읽지도 못했던 야구 관련 전문서적이었다.
그 책을 끼고 다니는 내 사진이 아직도 앨범 속에 남아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엄마에게 장난처럼 말하곤 한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싹수가 보였으면 조기에 야구를 시켜줬어야지.
그랬으면 지금쯤 엄마는 메이저리거 아들 봤을걸?"
엄마는 코웃음을 치며 넘기셨지만, 그 말은 내겐 진심 반, 농담 반이었다.
아니, 사실 내 마음은 조금 더 진심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의 출신지역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저 아버지의 영향이었던 걸까. 또 아니면
어릴 적,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팀의 상징이 뭔가 있어 보였던 ‘용’이어서였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MBC 청룡의 팬이 되었고, 그 팀은 이후 LG 트윈스로 이름을 바꿨다.
LG 트윈스는 내 유년의 중심이었다.
그중에서도 1994년의 우승은 내 인생에 남은 몇 안 되는 황금빛 기억 중 하나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그해의 선수들 이름은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다.
그해 신예 '특급 삼총사'였던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그리고 마운드에서 갈기머리를 휘날리던 마무리 투수, '야생마' 이상훈.
그들은 내게 야구 그 자체였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김재현과 이상훈.
그들의 배트 스피드, 마운드 위의 표정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 시절 나는, TV 속 영웅들만 바라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도 야구에 빠져 있었다.
20대 초반, 신촌에는 야구공을 던지는 게임장이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을 맞추면 인형을 주는 곳이었지만,
나는 그런 건 관심 없었다. 오히려 그 옆에 붙어 있던 속도 측정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90~100km, 빠른 사람도 110km 초반을 넘기기 어려워했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130km를 넘겼고, 135km까지 찍은 적도 있었다.
그곳 사장님이 말했다.
"자네는 진짜 프로 테스트 한번 봐야 하는 거 아냐?"
그 말이 마냥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재능이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트윈스는 오랜 침묵에 들어갔다.
1994년의 우승 이후, 팬들은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희망고문'을 당했다.
하위권을 전전했고, 급기야 '인내력 테스트 팀'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들려왔다.
그런 팀이, 바로 그 팀이 재작년, 무려 29년 만의 통합우승을 이뤘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건, 나와 비교되지 않을 오랜 시간 트윈스를 응원해 온 아버지와 함께 그 순간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살아생전에 트윈스 우승은 글렀어..."
그 말은 농담이었지만, 마음 한 켠의 체념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 티브이 앞에서 울컥하던 우리 부자의 모습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저장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았다.
1999년, 나는 군 제대를 했다.
사회로 돌아온 그 시기, 내 또 다른 야구 사랑이 시작됐다.
바로, 박찬호 선수.
이미 1994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그는,
내가 제대한 해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그는 명실상부한 LA 다저스의 에이스였다.
그 시절, 나는 완전히 그의 팬이 되었다.
그의 등판일정은 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눈을 비비며 티브이를 켜고, 박찬호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다.
때로는 등판이 연기됐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맥이 풀리기도 했고,
삼진을 잡을 땐, 혼자 박수를 쳤다.
홈런을 맞았을 땐,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가 마운드에 서 있을 때, 나는
다시 꿈을 꿔도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삶의 열기였고, 희망의 불씨였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산다.
이상은 찬란하지만 멀고, 현실은 가깝지만 평범하다.
나는 야구 선수가 되지 못했다.
그 어린 시절, 나름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순간, 오래전 꿈의 흔적이
조용히 내 등을 토닥여준다.
그게 TV 속 야구 중계일 수도 있고,
앨범 속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그 짧은 향수는 지금의 나에게, 묘한 위로와 작은 행복이 된다.
정말, 만약 그때 야구를 시작했더라면...
박찬호, 류현진 뺨치는 대한민국 역사에 남았을 불후의 메이저리거가 됐을지도 모르지.
(조금 진심으로 생각해 본다.)
지치고 바쁜 현실을 견디는 우리 모두는,
가끔은 지난 꿈을 꺼내 웃어볼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