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형 인간과 비겁한 동맹 속에서 진심으로 서는 법
어제 날짜의 기사를 접한 후 문득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글을 써본다.
<이익 앞에서 모든 동맹은 드러난다>
세계는 늘 정의, 보편가치, 동맹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돌아가는 판을 보면 그 모든 거창한 말들은 뜻밖에도 습자지마냥 얇다.
너무 얇아서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그 아래 있는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그 얼굴의 모습은 하나다.
이익.
최근 일본·중국·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잘 드러난다.
일본이 대만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밝히자, 중국은 곧장 맞불을 놨다.
그리고 동맹인 미국은 일본의 편에 서기는커녕 "중국의 입장도 이해한다"는 어정쩡한 말을 남긴다.
동맹을 외칠 때는 자국의 이익에 기반하여 단호하지만, 정작 상황이 복잡해지면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
일본이 서운함을 느낀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동맹이란 결국,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카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니까.
그런데 국제정치에서 벌어지는 이 풍경을 보며 무언가 나는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똑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스스로는 '합리적'이고 '중립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 편도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 편만 존재한다.
그들은 갈등이 일어나면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야. 나는 평화를 원해."
하지만 그 말들이 숨기고 있는 속뜻은 이거다.
"나는 손해 보기 싫다. 판단도 하기 싫고, 책임도 지기 싫다.
그러니까 무조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중재자' 코스프레를 한다.
하지만 정작 나서는 일도 없고, 어느 편에서도 싸우지 않는다.
그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안전한 곳에 숨는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이상이 아니라 비겁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증스러워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외피만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상황은 악화되는데, 그들은 늘 깨끗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중립'이라는 정의로운 단어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관계를 계산하지 않으며 살아온 편이다.
마음을 주면 끝까지 준다.
내 편이면 내 사람이고, 그 사람이 어려우면 함께 나선다.
그게 무식해 보일 수도 있다. 손해도 많이 본다. 배신도 당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인간관계의 최소한이라고 믿는다.
세상은 그런 헌신을 우습게 볼 때가 많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방식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익으로 묶인 관계는 위기 앞에서 모두 부서지지만, 믿음으로 맺은 관계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휘둘릴 필요도 없다>
살면서 크고 작은 사회를 수도 없이 지나간다.
학교, 직장, 가족, 팀, 모임...
그 모든 곳에서 갈등과 동맹과 분열은 계속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런 작은 나름의 정치판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선택할 수 있다.
누구와 함께 설 것인가.
나는 이제 관계에서
'내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대부분 알아본다.
중립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 이익 계산이 빠른 사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은 결코 내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늘 가장 먼저 빠졌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내준 마음은 버리지 않는다.
그게 나의 방식이고, 나의 동맹관이다.
<헌신은 장기적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익으로 맺은 관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으로 맺은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진다.
내 방식은 손해도 많고 상처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계산하지 않는 쪽에 서도록 하려 한다.
어쩌면 더 외롭고, 더 고단한 길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이익의 세계에서 나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내 인간관계관이 정답이 다거나 나 역시 홀로 정의로운 사람은 아님을 밝혀둔다.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