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시선: 그해 여름, 선문이
고3이 되던 1학기.
우리 반 뒷자리는 묘하게 다른 공기를 갖고 있었다.
규성이, 여한이, 찬희, 정만이, 그리고 나.
새 학년 새 학기가 되면 사내 녀석들 특유의 주먹 좀 쓰고 좀 논다 하는 녀석들이 하는 기싸움과 기선제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1학년 신입생 때부터 서로의 소문을 이미 익히 들어 이 넷과 나는 얼굴만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어떤 놈인지, 어디까지 가는 놈인지 다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일진이니 학폭이니 그런 건 없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서열이라는 게 존재했다.
누가 괜히 우리에게 시비 걸어올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우리도 딱히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말 안 해도 아는 선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선이 우리 다섯을 교실 맨 뒤, 1~4 분단 전체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수업보다 더 중요한 건 교실 뒤에서 흘러가는 하루였고, 그 공간이 우리에겐 본관보다 더 '우리 학교' 같았다.
그런데 그 뒷자리에서 가끔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힐끔. 또 힐끔.
앞줄 어디쯤에서 나를 계속 보는 시선.
그 주인공은 맨 앞줄의 책상, 단정한 교복, 흐트러짐 하나 없는 뒷모습.
강선문.
그땐 신경도 안 썼다.
"저 새끼 뭐지?" 그 정도.
여름방학 보충수업.
더운 공기 속에서 반은 자고 있고, 나도 엎드려 땀을 흘리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날 누군가 내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선문이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라 자기 자리로 후다닥 도망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어나서 그에게 걸어갔다.
"야. 너 뭐냐? 할 말 있냐?"
선문은 말 끝을 씹어먹으며 머뭇거렸다.
"... 영완이... 맞지? 양지중학교 나온... 그 영완이."
저항 없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 그걸 지금 묻냐? 벌써 고3 여름인데."
"... 진짜 너 맞구나..."
"그래, 인마. 나 영완이다. 너 선문이 맞지?"
그제야 그는 흐릿해진 옛 인연을 붙잡은 얼굴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선문이 짝을 내 자리인 뒷자리로 보내고 선문이 옆자리에서 수업을 들었다.
내 짝이던 찬희가 뒤에서 툭 치며 말했다.
"야. 너 갑자기 왜 걔 옆에 가서 앉아있냐?"
"고3이면 공부 좀 해라, 이 새끼야. 뒤에서 퍼질러 잠만 자지 말고."
"저거 더위 먹고 완전 미쳤네?..."
찬희는 나지막이 읊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선문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중학교 땐 그저 지나가는 이름이었는데, 고3 여름이 되니까, 오히려 그때 놓친 연결을 다시 붙이고 있었다.
그즈음, 바이크에 미쳐 있던 같은 반의 병준이가 다가왔다.
"야 영완아. 너 내 거 오토바이 알지?"
"알지. 네가 한번 보여줬잖아. 개조해서 존나 잘 나가는 거."
"내가 다른 쌔끈 한 놈이 하나 생겨서 말인데... 너 탈래? 팔려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
"육십."
"야 이 미친놈... 그 돈이 어딨 어."
"천천히 줘라. 다른 어중이떠중이 새끼한테 파는 것보다 네가 타는 게 낫다."
그 말에 심장이 또 쿵 올라왔다.
아, 이건 타야 한다.
그땐 그게 전부였다.
그날 저녁, 큰누나가 거실에 들어오기 전 현관에서 나는 조용히 말했다.
"누나야... 나... 진짜 중요한 일이 있는데... 육십만 원만 빌려주라.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주고."
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말했다.
"... 알았어. 내일 줄게."
그 돈이 누나에게도 큰돈이었을 건데 잔소리 한마디 없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 순간 누나는 마치 천사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 시절 유행하던 '감마'라는 바이크를 손에 넣었다.
그 엔진을 처음으로 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터진 탄성.
"와. 씨발 죽이네."
그 순간 대학도 그 시절 꿈이었던 가수가 되고 싶다는 미래도 다 잊혔다.
'감마'와 나는 그 후로 몇 달 동안 함께했다.
새벽, 비, 곡선도로, 친구들의 뒷자리.
모든 게 그 엔진음에 묻혀 지나갔다.
결국 나중에는 고장 나서 수리비가 샀던 금액 보다 더 나오고 돈이 없어 찾지 못했지만, 그 몇 달은
그냥 '살아있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 선문이가 말했다.
"영완아, 저녁에 시간 돼? 누구 좀 소개시켜 주려는데."
성당 앞 놀이터.
가보니 선문이 옆에 여자애 둘이 있었다.
혜진, 미애.
혜진이 날 보더니 말했다.
"나 너 알아. 너 선애랑 자주 붙어 다녔잖아. 명성여상의 선애."
선애.
그 이름이 나오자 입안이 말라붙었다.
선애는 명성여상에서 꽤나 잘 나갔고, 유명했던 아이로 우리 무리랑 어울리는 애였다.
나와도 미묘한 기류가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넷이 자주 만났다.
밤새 떠들고, 라면 먹고, 성당 계단에서 바람맞고. 그냥 그게 좋았다.
선문이는 슬쩍 말했다.
"영완이 너는... 미애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난 미애랑 잘 어울려야만 했다. 왜냐면
선문이는 혜진이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문제는 하나였다.
혜진이가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
그때부터
여름밤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여름밤, 삐삐가 울렸다.
혜진이었다.
"그날 만난 놀이터... 오늘 좀 나와줘. 할 말 있어."
하필 그날, 여한이 에게도 연락이 왔다.
"야 영완아. 오늘 영지대 광장으로 와라. 선애 온단다. 선애가 너 오늘은 진짜 오라더라."
둘 다 같은 시간.
나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젠장. 왜 하필 오늘이냐..."
나는 결국
혜진이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건 혜진을 택했다기보다,
오늘, 이 관계를 정리하려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선문이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한이에게 전화했다.
"야 여한아... 오늘 못 간다. 진짜 중요한 일이 있다. 나중에 말할게."
"... 알았다." 여한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혜진이는 그늘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혜진아... 우리 둘이 따로 만나는 건 이제 그만하자. 선문이가... 너 좋아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혜진이는 잠시 침묵했다.
"... 그래. 알겠어. 그것 말곤 더 할 말은 없는 거야?..."
혜진이의 그 목소리에
어떤 계절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응."
나는 바이크에 혜진을 태우고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둠 속, 골목 한쪽 점봇대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선문이.
그 녀석의 눈빛은
분명히 '분노의 마음'을 향해 있었다.
→ (상편 끝)
그리고 그 골목에서,
그해 여름이 타들어가고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