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 그리고 영영 오지 않을 약속
12월이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올해의 12월은 유난히 낯설고 서늘하다.
두툼하게 시작했던 달력은 어느덧 마지막 한 장만 남아 벽에 걸려 있다.
한때는 알차고 풍성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겨 놓고 떠난 것 같다.
한 해가 지나간다는 건, 다른 의미로는 인간으로서 태어나 우리가 한 발자국씩 한정된 삶으로의 끝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올해의 마지막 달은 유난히 무겁다.
며칠 전, 오래된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정말 오랜만에 통화한 전화 너머로 힘차게 들리던 목소리.
"야, 우리 얼굴 좀 보고 살자. 이번엔 날 잡아 꼭 보자."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소식을 전해 준 다른 친구는
마치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울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그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허공만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친구는 건강했다고 했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자기가 꾸린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도 성실히 운영하며
언제나 미래 계획을 말하던 사람이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사람 목숨이 이렇게 허망하게, 이렇게 가볍게 사라질 수 있는 걸까.
사인을 들으면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직업의 특성상 불규칙한 생활, 조금 좋지 못했던 신장, 그런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 모아 의미를 붙여 보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어떤 이유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죽음이란 것이 흔한 조건이라면
이 세상 사람들 중 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 친구만 떠나갔다.
그 사실이 너무 황망하고, 너무 슬프고,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동안 나는 계속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 오래전부터 갈망해 온 영원한 생명에까지 생각이 닿았다.
<진시황>도 불사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맸다.
황제라는 자리가, 손에 쥔 권력과 부가 영원히 자기 것일 거라고 믿고 싶었겠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쥔 모든 것이 무력해지는 순간을
인간은 참아내기 힘들다.
종교는 우리에게 '영생'을 말한다.
착하게 살면, 신을 믿으면, 죽지 않는 생명을 주겠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믿음과 선함이면 된다고.
사람들이 그 말에 기대는 이유, 어쩌면 너무 간단하다.
죽음이 무섭기 때문이다.
삶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하루하루가 버거운 사람도 있다.
병마와 싸우는 사람,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 영생은 또 다른 고통의 연장이 아닐까.
이렇듯 영생은 누구에게는 희망이고
누구에게는 절망이고
누구에게는 단지 '죽음이 두렵다는 사실'을 감추는 말일뿐이다.
나는 이미 몇 명의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아직 젊다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에 그들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전, 오랜만에 "너무 반갑다, 얼굴 보자"던 그 친구까지.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해진다.
왜 이렇게 허무하게, 갑자기, 사람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일까.
인생을 살면서 연말이 되면 우리는 늘 한 해를 정리한다.
이룬 것, 못 이룬 것, 새해 계획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성취보다 내 몸이 무사히 견뎠다는 사실이 더 먼저 떠오른다.
건강하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뒤늦게야, 너무 늦게야 깨닫게 된다.
언제부턴가 내 인사는 "잘 지내지?"에서 "건강하지?"로 바뀌었다.
그 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게 더 절실하고 건강하다는 것이 곧 잘 지내는 것이란 걸 나는 이제야 안다.
이제는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아니,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죽음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영생이 꼭 필요한 건 아니란 걸.
나는 그저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웃고 싶고,
한 해,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곧 한 살을 더 먹는다.
그래, 어차피 또 먹게 될 한살이라면
올해는 맛있게 먹을 생각이다.
여러분도 맛있게, 그리고 건강하게
한 살 더 드시길 바란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