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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일본 여행

십 년 치 효도를 한 번에 다한 시간

내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처음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으셨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고

'가서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용기 하나만 믿고 떠나는 딸에게, 단 한 번의 반대 없이 필요한 경비부터 물어보셨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딸을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제 내가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되고

딸이 그때의 내 나이가 되어보니,

철도 들기 전에 떠났던 나를 묵묵히 응원해 주신

그 믿음과 사랑의 깊이를 다시금 헤아리게 된다.


미국에서 결혼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바쁘다는 핑계로 한국의 엄마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연락하기도 어려웠다.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가,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문득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엄마를 닮았었구나.

그제야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엄마의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로 틈날 때마다 엄마에게 연락하고,

시간을 내어 한국에 자주 가려 노력했다.

고베 아리마 그랜드호텔 앞 저녁 풍경

고베 아리마 온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시던 밤


설 연휴를 끼고 2주간 한국에 가게 되었을 때,

남편이 성화였다.

“엄마 건강하실 때, 지금이 기회야. 여행 다녀와!”

피부 시술도 해야 하고 눈썹 문신도 해야 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 짱구 눈썹으로 변신한 나는,

아이처럼 설레어하시는 75세의 엄마와 함께

둘만의 3박 4일의 오사카 근교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와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음식이 짜다, 달다 불평하기 없기.

이거 얼마냐, 비싸다 하기 없기.

그리고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말, 절대 금지.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다고 그래~” 하셨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럴 확률이 꽤 높다는 걸.


오사카 공항에 도착해 고베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렸을 때까진 순조로웠다.

그러나 설 연휴라 아리마행 버스표가 모두 매진이었다.

지하철을 타려니 몇 번이나 환승해야 하고,

발목이 불편한 엄마를 생각하니 도저히 무리였다.

결국 택시를 탔는데, 고작 20분 거리가 만 엔,

한국 돈으로 십만 원 가까이 나왔다.

순간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예매할걸’ 싶었지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바다와 산길을 바라보며

“그래도 편하네, 잘했다” 하시는 엄마의 한마디에

더 이상 후회는 안 하기로.


호텔에 도착하니 기모노 차림의 직원이

짐을 들어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탁 트인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과

은은한 다다미 향이 배어 있으면서도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객실을 둘러보며

엄마는 연신 감탄을 쏟아내셨다.

“어머나, 우와, 세상에…”

같이 오지 못한 이모들을 떠올리며

사진을 찍고 또 찍으셨다.

다다미와 침대가 함께 있는 객실

짐을 풀고 호텔 셔틀을 타고 5분 남짓 거리의

아리마 온천마을 중심가로 산책을 나갔다.

작고 아기자기한 골목은 마치 지브리 만화 속 풍경 같았다.

찐빵을 사서 나눠 먹고,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며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이 재미있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막 쪄진 찐빵

호텔로 돌아와 9층 노천탕에 몸을 담그자

언덕 아래로 반짝이는 마을 불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겨울 찬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뜨거운 온천수가 그 찬기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이렇게 좋은 데도 있구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엄마의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예요, 김여사, 더 좋은데도 많아. 나랑 다 가봐야죠.”


정갈하게 차려진 가이세키 저녁상엔

그릇마다 정성이 담겨 있었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고베 소고기 한 점에

여기까지 오는 길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오사카와 교토, 그리고 엄마의 메모


다음날 오사카와 교토에서 보낸 시간은 조금 빡빡했다.

교토 버스 투어는 사찰마다 내려걸어야 하는 여정이 많아 힘들었지만,

엄마는 “괜찮다”며 버스 창가로 스쳐가는 풍경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하셨다.


오사카 난바 시장에서는 주먹만 한 굴을 보고 신기해하셨고

온천에서 마음에 들었던 말기름 로션을 찾아

온 상점가를 이리저리 뒤지셨으며,

새벽 시간에 돈키호테에 들어가

이모들에게 줄 영양제를 고르셨다.

당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이 엄마였다.


여행 내내,

엄마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여기가 어디라고 했지?” 하며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는 핸드폰 메모장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 넣으셨다.


왜 그러시냐고 묻자,
“나중에 친구들이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자랑해야지.”

신나는 표정의 엄마 말에 웃음이 났다가 문득,
그동안 엄마는, 늘 친구들의 자랑만 조용히 들어주셨겠구나.
왜 이제야 이런 시간을 함께했을까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여행이 끝날 무렵, 엄마는 말했다.

“죽기 전에 여기 온천 한 번만 더 데리고 와 주라.”

처음엔 힘들어 “다신 못 오겠다” 하시던 분이었는데,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또 오자.”

교토 대나무 숲을 걸어가는 무사(?)들

집에 돌아와

그동안 블로그를 운영하며 익힌 편집 기술로

엄마의 여행 영상을 짧은 숏폼 형태로 만들어드렸다.

그동안 못했던 자랑, 친구들에게 실컷 하시라고.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영상을 보며 좋아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늦었지만 마음 한편에 쌓여 있던 십 년 치 효도의 빚을

조금은 갚은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언제 또 이렇게 엄마와 함께 여행할 수 있을까.

시간은 늘 빠르고, 기회는 생각보다 짧다.


영영 오지 않을 ‘적당한 날’을 기다리기보다

순간순간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사랑을 표현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다시 한번 나와 약속해 본다.

교토 대나무숲에서: 사랑해요, 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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