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보라 치던 융프라우에서
두 번째 스위스 여행을 준비하며
첫 번째 여행 때 놓쳤던 하이킹과 액티비티를 꼭 해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여행 날짜가 다가올수록
날씨 앱에는 연일 비 구름이 떠 있었다.
앞뒤로 일주일은 맑은데,
그린델발트에 머무는 사흘만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는 예보였다.
이미 호텔을 바꾸기엔 늦었다.
“에라 모르겠다, 또 비 오는 스위스를 보는 건가...”
그렇게 포기반 희망반을 품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남편과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
우리 네 식구가 함께였다.
취리히에서 바로 루체른으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호텔 침대 위에 모두 쓰러지듯 누웠다.
꿀맛 같은 낮잠을 한 시간 정도 잤을까.
밖으로 나가니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루체른의 성곽길을 걸으며 바라본
맑은 하늘 아래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투명한 루체른 호수 위로 백조 한 마리가 유유히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차이콥스키라도 된 듯
머릿속에 음악이 흐른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시내에 스위스 전통 식당에서
메뉴는 간단하지만 가격은 간단하지 않은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호수와 다리들이 조명과 함께 반짝반짝 예쁘다.
다음 날, 그린델발트로 향했다.
융프라우에는 오후부터 눈보라가 예보되어 있었다.
서둘러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다.
그린델발트 역에서 최신형 곤돌라인
아이거 익스프레스를 타고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지는 마을 풍경이
안데르센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아이거 글래쳐 역에서 산악열차로 갈아타고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하니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 이게 바로 고산병이구나.”
한여름임에도 입김이 나오는 추위에
미리 챙겨간 옷과 장갑을 꺼내 입고 벽을 짚으며 엉금엉금 걸었다.
얼음동굴을 지나 따뜻한 카페테리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통유리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설원.
그 장엄한 풍경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까이 있었지만
곧 몰려온 구름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마 세상에서 제일 비쌀법한
신라면 하나를 시켜 먹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매콤한 라면 국물에서
이상하게 안도감이 났다.
비록 창밖은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그 순간만은 등 따시고 배부르고 만족스러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클라이네샤이덱을 거쳐 라우터브루넨 쪽으로 향했다.
내려오는 내내 구름은
눈을 뿌렸다, 비를 뿌렸다 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그리고 이날부터 이틀 내리 비가 내려
피르스트 하이킹과 액티비티는 물거품이 되었다.
날씨 때문에 틀어진 계획을 수정하면서
이번 여행에 든 비용, 시간 등을 생각하니
잠시 짜증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다음날, 여전히 촉촉한 아침,
구름을 품은 멋진 전망이 펼쳐진 숙소 테라스에 앉아
진한 커피를 마시며 드는 생각.
완벽한 날씨와 완벽한 풍경이 아니면 어떤가.
함께 비 맞고, 함께 걸었던 이 시간이
추억으로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다면—
그보다 완벽한 날은 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