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을날의 체르마트, 리펠제 하이킹
체르마트의 가을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여름 하이킹 시즌이 끝나고 스키 시즌이 시작되기 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산과 마을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시간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기차는 일부 구간이 버스로 대체되었고,
문을 닫은 호텔과 레스토랑도 제법 있었다.
이틀 동안 머물며
하루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로,
하루는 수네가 호수 하이킹을 갈 계획이었지만
수네가 곤돌라가 하필 이날부터 운휴를 시작해
하루가 뜻 하지 않게 비어버렸다.
그래서 계획을 바꿔
하루는 고르너그라트 하이킹을,
다음 날은 체르마트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체르마트역 앞에 있는 산악열차,
고르너그라트 반(Gornergrat Bahn)이다.
이 빨간 장난감 같은 열차는 힘든 기색도 없이
체르마트 마을과 고르너그라트 정상을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지붕들이 점점 작아지고,
멀리 있던 마터호른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하얀 눈이 덮인 봉우리들이 고개를 내민다.
고르너그라트 정상에 도착해 사진을 찍고
이탈리아 쪽 산맥도 한번 봐주고 기념품 가게에도 들렀다.
그렇게 천천히, 또 한참 머물다 내려오는 길.
한 정거장만 내려가면 로텐보덴(Rotenboden) 역.
여기서부터 진짜 하이킹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다져놓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언덕 아래로 리펠제(Riffelsee)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멀리서 보았을 땐 그저 작은 호수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잔잔한 물 위에 또 하나의 마터호른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즈넉한 가을 오후,
부드러워진 햇살 덕에 호수는 완벽한 거울이 되어
마치 ‘너만 봐’라고 속삭이며 비밀을 보여주는 듯했다.
리펠제에서 리펠베르그(Riffelberg)까지 약 1시간.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초보자도 걸을 수 있는 코스라고 한다.
아마도 그건, 스위스 사람 기준의 초보자일 것이다.
우리 같은 외국인 여행자라면
‘가벼운 중급 코스’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
내려오는 내내 마터호른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솜사탕을 만드는 것처럼
볼 때마다 봉우리 옆으로 새로 구름을 만들어내는
마터호른이 신기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
알프스의 가을 공기와 적막함 가운데,
등산로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이
네 명의 아줌마들만 걷고 있었다.
리펠베르그역에 도착해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산악열차를 타고 체르마트 마을로 내려왔다.
다음날도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마을을 걸으며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고, 초콜릿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마을 공원에서 마터호른을 보며 일광욕도 했다.
서쪽 전망대 다리에 가서
어제도 실컷 본 마터호른을 마치 처음 본 양,
또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마을 산책을 하며 느긋한 오후를 보냈다.
교회 종소리가 수시로 울려 퍼지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지는 여유.
해 질 무렵,
야경을 보러 기차역에서 도보로 20분쯤 마을 골목길을
등산하듯 올라가 만난 Matterhorn Viewpoint.
숨이 턱끝까지 찰 때쯤 도착한 전망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날이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우뚝 솟은 마터호른 아래,
마치 접었던 반짝이 치맛자락을 펼치듯
하나 둘 빛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수네가 호수 곤돌라가 운휴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덕분에 마을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리펠제 호수의 비밀스러움도,
산책하며 둘러본 마을의 아기자기함도
마을에 총총히 불이 켜지던 예쁜 저녁의 순간도,
모두 그 여유 덕분에 가질 수 있었다.
때로는 닫힌 길이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우리를 데려다주기도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