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셔서, 아침과 저녁에만 볼 수 있었다.
학교와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빈 공기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공기는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졌다. 하루는 외로움이 가득 찬 공기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밖을 나가면 온통 내 세상이었으니까.
어렸을 때 외가 식구들과 한 동네에 살았다. 외할머니와 이모는 정말 가까운 곳에 사셨고, 가족뿐만 아니라 친한 이웃도 많았다. 한 아이가 잘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나는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외할머니로 채워서인지 나는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많다. 경로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점심을 먹고 윷놀이를 한바탕 한 적도 있다.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동네 시장을 가서 장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힘이 장사였던 나는 할머니보다 키가 작아도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항상 입버릇처럼 할머니한테 드린 말씀이 있다.
"할머니, 오래오래 100살, 1000살, 1억 살까지 살아! 알았지?"
그냥 내 곁에 오래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만큼 외할머니가 좋으니까. 항상 내 옆에 함께하실 것 같은 할머니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온다.
4학년 때쯤인가? 엄마에게서 사이렌 같은 전화를 받게 되었다.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 너희 외할머니 치매시래.. 우리 엄마.. 기억이 점점 잃어간대.."
학교를 마치고 실내화 가방을 돌리면서 집을 가던 중에 들은 소식은,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큰 슬픔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할머니가 이제 나를 기억 못 하실 수도 있다니. 그동안의 추억을 나만 기억할 수 있다니. 왠지 단짝 친구를 한 명 잃은 것 같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한평생을 그렇게 힘들게 사셨는데, 하나님 정말 계신 거야? 왜 우리 할머니한테 그래 왜?!"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더 슬프셨을 텐데, 엄마 앞에서 따지듯이 물었다. 그냥, 정말 어린 마음에.. 정말, 할머니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날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 나 잊지 마. 알겠지? 진짜야.. 잊지 마.. 기억해 줘..."
"어이구 그럼~ 우리 똥강아지 기억해야지, 이 할머니가 어떻게 잊어? 우리 강아지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고 그랴~ 알았지~?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될 거여~"
매일마다 똑같은 이 레퍼토리는 또다시 나의 눈을 적셨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외할머니는 나의 존재를 잊으셨다. 기억이 왔다 갔다 하시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누구세요?"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누구세요'라는 그 네 음절이 내 마음에 화살을 꽂았다. 아 이제 정말 잊으셨나 보다 하며 말이다.
비록 할머니는 거의 매일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그래도 살아계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한 추억은 나만 기억하고 있지만,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라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계시니, 뵙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머니를 뵈러 갈 수 있다.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나의 놀이 친구, 나의 사랑스러운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