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푹신한 모래의 기적

높았던 미끄럼틀과 그날의 안도

by 바래

그 아이, 순호는 유독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이였다. 부모님이 헤어진 뒤 아빠와 함께 본가로 들어와 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던 아이.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 탓이었을까, 순호는 종종 친구들을 자극하는 삐딱한 말과 부적응 행동으로 교실의 조용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바깥 놀이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낡고 높은 미끄럼틀 위에서 사달이 났다. 여섯 살 순호가 일곱 살 형인 성열이를 향해 얄미운 말로 한참을 약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참다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성열이가 미끄럼틀 꼭대기 난간에서 순호를 밀쳐버렸고, 찰나의 순간 순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초등학교용 미끄럼틀은 유치원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꽤나 아찔한 높이였다. 난간 너머로 떨어지는 아이를 보며 내 심장도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적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순호가 마치 솜이불 위로 내려앉듯 푹신하게 몸을 묻은 것이다.


전날, 교장 선생님께서 "아이들 놀이시설이 너무 높고 위험해 보인다"며 모래를 한 트럭 불러 놀이기구 주변에 두껍게 깔아두셨던 것이 떠올랐다. 그 성견지명 덕분에 아이는 딱딱한 맨땅이 아닌 부드러운 모래 언덕 위로 안착할 수 있었다. 만약 평소처럼 다져진 흙바닥이었다면 골절이나 더 큰 부상을 피하기 어려웠을 상황이었다.


"순호야, 괜찮니? 어디 아픈 데 없어?"

"선생님, 배가 아파요."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아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보건 선생님도 없는 작은 학교였기에 나는 서둘러 교장 선생님께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는 읍내로 달려가 아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마시는 청심환을 사 와 먹였다.


사고의 뒷수습도 차근차근 진행했다. 순호네 집에는 아이가 형을 자극했던 상황과 사고 경위를 상세히 전했고, 성열이네 집에도 아이가 친구를 밀쳐 많이 놀랐을 텐데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작은 시골 동네라 소문은 금방 퍼졌지만, 다행히 성열이 어머니가 순호 고모님께 먼저 전화를 걸어 사과와 안부를 전하면서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아찔했던 경험은 이후 나의 교직 생활에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다. 사고란 불시에,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기에 완벽히 막을 수는 없지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벽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 바깥 놀이를 나갈 때면 아이들과 안전사고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철저하고 세심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의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고, 위험한 싹이 보일 때면 단호한 말로 제지하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지금 생각해도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기억이다. 아이를 살린 것은 푹신한 모래였지만, 그 모래를 깔아둔 어른의 따뜻한 시선과 그날의 아찔함을 잊지 않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쏟았던 나의 부단한 노력, 그리고 수많은 행운이 모여, 지난 38년의 세월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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