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정교사로 발령받은 그해 3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면서도 서글픈 달이었다. 전임 강사 시절 20만 원 남짓하던 월급이 보너스 덕에 처음으로 100만원대의 숫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돈의 액수보다 ‘안도감’에서 왔다. 매년 재계약을 걱정하며 찬바람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리고 옆 반 선생님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당당하게 내 교실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벅차게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00만원대의 월급을 받아 기분이 좋겠어요."라며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시선들 속에서, 나는 더 완벽한 실력을 갖춘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방통대 편입을 하고 2년동안 장학금으로 졸업한 뒤, 나는 그 당시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유아교육과에 도전했다. 전국에서 11명을 뽑는 그 좁은 문을 당당히 뚫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은 상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당시 대학원은 일반 대학원생들과 똑같은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했고, 동기들은 스트레스로 하혈을 하거나 원인 모를 복통, 두통에 시달릴 만큼 압박감이 대단했다. 차도 없던 시절, 나는 연가를 내고 봉화에서 청주까지 기차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며 그 먼 길을 오갔다.
가장 나를 무너뜨린 것은 논문 지도였다. 교수님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 속에 내 논문은 방치되었고, 찾아갈 때마다 내 인격을 부정하는 듯한 모진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감히 토를 달 수도 없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올 때면, 나의 자존감은 지하 몇 층 밑바닥으로 한없이 꺼져 내려갔다.
돌아오는 기차 안, 나는 늘 편의점에서 포카칩 한 봉지를 샀다. 바삭거리는 과자를 씹으며 창밖을 보다 유리창에 비친 내 눈물을 발견했을 때, 그 속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한참을 더 울었다. 하지만 울음은 잠시였다. 제천역쯤 지나 승객들이 빠져나가면 나는 앞좌석 의자를 돌려 논문 자료를 가득 펼쳤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눈물을 닦으며 교수님이 지적한 문장들을 고치고 또 고쳤다.
그 지독한 과정을 꼬박 두 학기나 반복했다. 밤을 새워 교정하고, 우편을 보내고, 다시 욕설 섞인 지도를 받으러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흘린 눈물과 짭조름한 포카칩의 맛은 내가 단순한 교사를 넘어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가장 값진 통행료였다. 그 터널을 지나 마침내 손에 쥔 학위는, 훗날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티게 해준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