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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하는 요기니

나의 요가 5) 몸과 정신, 그 사이의 정치 그리고 신념

새로 만나는 사람과 함께 식사 약속을 잡기 전에 꼭 먼저 하는 말이 있다. 고기를 안 먹는다고. 그러면 어떤어떤 것들을 먹지 않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문답 뒤에 꼭 듣는 질문이 있다. "원래부터 고기를 안 좋아했어요?" 간단히 답하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어릴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고기쟁이였다. 엄마가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게 어릴 때부터 훈련시킨 덕에 상다리 위에 올라오는 모든 요리를 끝까지 먹는, 식탁 지킴이. 그러다 20대가 되어 자취를 시작했고, 저녁상 차려주는 엄마가 부재하니 생존본능이 발현되었다. 나는 매 끼니에 그래도 채소와 단백질류를 함께 섭취하려고 노력했다. 특히나 라면이나 밥으로만 때우지 않고 꼭 단백질을 채우려고 했다. 그래서 학교 근처 보리밥집을 즐겨 갔고, 김밥천국에 가면 주로 비빔밥을 먹었다. 밤중에 식욕이 당길 때는 배달탕수육집이나 최애 치킨을 시켜 먹었다. 쿠폰도 솔찬히 모아서 몇 번은 공짜 치킨을 얻어먹은, 평범한 20대 서울유학생이었다.

학부를 졸업한 뒤부터는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방에서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닭도리탕이나 카레 등 손이 가는 음식들은 정말 어쩌다 한 번씩 해먹었고, 대부분은 대충 데친 부추와 계란, 참치, 초장을 넣고 비빈 밥과 도시락김을 두고 먹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식료품 값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가만 보니 계란이 너무 저렴했다. 당시에는 한 판에 4천 원 정도였다. 정말 비싼 건 채소였다. 그래서 나는 단돈 천원으로도 살 수 있는 부추나 상추를 사먹었다.

그러던 중 연애를 시작했다. 한 소프트웨어 회사의 '문제 생기면 뒷처리하는' 엔지니어인 그는 당시 수원 삼성전자 건너편 원룸가에 자주 출입했다. 안드로이드 업데이트 출시 시기가 되면 그는 그 공간에서 밤낮없이 삼성 아저씨들과 통화하며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끼니를 챙기는 경우도 다반사. 이러한 연유로 그는 밤늦게까지 여는 값싼 장터치킨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사 먹었다. 저녁 먹었냐고 물어보면 치킨 사다가 편의점 맥주와 함께 먹는다는 답을 들을 때가 많았다. 대한민국에 치킨집이 많은줄은 알았지만 치킨을 이렇게 자주 먹는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치킨이 가성비가 가장 낫다니. 치킨을 사 먹는 게 가장 싸고 편하다는 사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식을 가볍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유를 살 거면 두유를 사고, 웬만하면 내가 스스로 해먹을 반찬으로 고기를 사지 않는 식으로. 채식에 대한 관심 자체는 시기상 그와 만나기 전부터 있었다.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를 올라타 열심히 여성주의에 관한 책을 읽고 관련 지식을 흡수하던 나는 여성혐오와 육식을 문화적으로 연결시키는 『육식의 성정치』의 접근에 특히 궁금증이 있었다. 이후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었지만, 나 역시 굳이 고기를 끊지는 않았다. 

아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2020년부터다. 대단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다. 꼼짝달싹 못하는 닭장에서 모이를 쪼아먹고 배설물과 달걀을 아래로 빼내는 닭들의 알도, 사료를 먹여 살을 찌워서 그저 잡아먹히기 위해 길러지는 어떤 동물의 고기도 내 몸에 전혀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2018년부터 석사를 다녀서 다시금 학생식당에서 고기반찬을 피하면서도 저렴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내 남자친구처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도 있는데, 나 하나 정도는 고기 안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육고기와 계란을 먹지 않는 나름의 채식을 시작했다.


이 긴 대답을 '아니오. 원래 잘 먹었는데 이제 먹을 만큼 먹은 것 같아서요!'라고 줄여서 답하면 뒤따르는 질문이 있다. "고기 먹고 싶지 않아요?" 자기도 채식을 해보려고 했는데, 너무너무 고기가 먹고 싶었다고 자기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강아지와 고양이들과 함께 사는 걸 아는 사람들은 둥물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채식을 하는 게 아니냐고 짐작하기도 한다. 땡! 나의 채식은 그렇게 묻는 바로 그 누군가에게도 향하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제스처다. 고기 안 먹고 완전방사 계란만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공장식 축산업자와 그 동물을 먹는 평범한 소비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향하는 작은 반항이다. 페미니스트인 나는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채식을 한다. 나에게 채식은 내가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고 조금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동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개인적 존중의 표현은 아니다.

나는 비건도 아니다. 해물과 유제품을 섭취하는 '낮은 단계'의 채식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정치적 의제로서 비거니즘에 별로 관심이 없다. '타자'를 고려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을 주로 공부했고 여성주의나 장애학 등 으레 진보적이라는 생각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편이지만, 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발이나 동물권에는 (적어도 아직은) 그렇지 않다. 다분히 강박적이고 통제적인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다. 그래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좌절에 매몰되지 않고,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권에 대한 태도도 그런 성격에 기인한다. 나는 권리란 철저히 인간의 영역인 정치에 참여하는 지위를 부여하는 딱지라고 믿기 때문에, 가축동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동물권'보다 '와해된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기를 선호한다. 


내 머릿속 인간 행동의 범주는 크게 몸에 관한 것, 정신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으로 나뉜다. 나는 대체로 몸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내게 몸의 영역에 가까운 요가를 시작한 뒤로는 더욱 그렇다. 요가를 하며 몸이 풀리니까 머릿속이 맑아지고, 잠깐 힘을 쓰고 좋은 긴장에 머무른 뒤에 더 큰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말 그대로 체험했다. 정신적인 것은 나의 몸뚱아리 하나를 초과한다. 나의 생각 중에 나만의 오리지널한 것은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배웠던 모든 것, 지금의 사회를 만든 이전의 모든 인류 역사와 온갖 문화적 규범과 믿음에서 벗어난 순수한 나의 정신은 없다.

마지막 범주, 정치는 우주의 먼지인 일개 개체로서 몸의 영역과 거대한 정신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다. 나는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것이 결국은 이 정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흔히 자기 몸과 정신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가 몸과 정신에 있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치다. 오래된 정신과 그 문화에 대항해 다른 목소리를 내고, 그걸 넘어서 다른 문화와 신념을 주장하는 일은 물론 정치적이다. 혹은 고기를 거부하는 나의 식생활처럼 그저 어떤 문화에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어떤 것에든 거기 순응하는 행동까지 모두 정치다. 적극적으로 행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인의 마음가짐이나 삶을 바꾸는 방법이 두 가지라고 본다. 몸을 다르게 활용하는 것,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적극적으로 정치를 하는 것. 의지는 정신이라는 거대한 푸딩 속 점처럼 콕 박힌 바닐라빈과 같다. 의지만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웬만한 충격에는 조금 출렁거리고 말 뿐인 정신에 작은 바닐라빈은 균열을 낼 수 없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재하는 푸딩 속 바닐라빈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 푸딩 그림에 찍힌 하나의 점이며, 그 점은 무엇도 될 수 있고 심지어 푸딩과 점이 모두 놓인 2차원 평면의 앞뒤를 뚫을 수도 있다는 것. 그 뚫린 구멍에 실이든 빨대든 뭐라도 끼워 넣는다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그 기둥이 곧 나의 신념이 된다. 신념은 나만의 기준으로서 어떤 푸딩 안에 있든지 내 정치와 몸 모두에 관여한다. 여성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페미니즘은 나의 단단한 기둥, 신념이다.


나의 사적인 욕망으로만 알았던 것을 정치라는 눈으로 바라보면, 반대로 공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습관을 내 몸과 자아라는 눈으로 바라보면, 다른 방향이 보인다. 이미 페미니스트이던 2018년에 미약하게 시작한 채식과 요가는 2020년 이후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요가하는 채식주의자, 채식하는 요기니였다. 생활과 여건이 달라지면서 나의 요가도 채식도 조금씩은 달라졌지만, 모두 지속하고 있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요기니이자 베지테리언,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만 보면 어떤 전형 같아서 조금 머쓱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물렁 허당이다. 내게 채식은 정치의 영역이었고, 요가 역시 몸의 영역에서의 행위이지, 신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채식과 요가가 이제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라이프스타일 영역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 지점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스트로서 유제품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은 오래 했는데, 몇 년째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요가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면서 목표 삼았던 셀프수련 역시, 시작도 못하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시도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버터가 들어간 빵이 없어지는 게 아직 너무 아쉽고, 혼자서 다칠까 봐 셀프수련은 그저 널널하다. 이제 조금 더 두꺼워질 때 같다. 두려움과 아쉬움을 넘어, 다쳐도 계속하고 아쉬워도 먹지 않는 단단한 신념으로. 그러면 어떤 전형으로 납작하게 보여도 스스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힐 때 상대로부터 들을 수 있는 어떤 오해도 감당할 기꺼움이 있는 것처럼.

낮이 긴 여름철은 그간 지지부진했던 발돋움을 응원하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금만 해도 땀이 흐르고 티가 나는 이 계절. 별다른 속박 없는 개백수로서 내가 원하지만 필요 없는 건 조용히 멈추고, 다른 필요를 향해 뜨겁게 나아가기로.




뭐 이렇게 길지... 몇 번씩 더 수정할 것 같지만 일단 올려본다 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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