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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애씀 끝에, 사바아사나

나의 요가 2) 요가의 끝은 송장자세

어떤 요가 수련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지금 누군가 묻는다면, '아쉬탕가'를 꼽겠다. 아쉬탕가는, 창안자인 파타비 조이스가 1948년에 정립한 아사나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 가는 요가의 한 가지 수련 방식이다. 그 흐름은 처음에 태양경배 시리즈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몸을 덥히고, 서서 하는 자세와 앉아서 하는 자세, 누워서 하는 자세에 이어 깊은 후굴과 머리서기 등 머리가 심장 아래쪽에 놓이는 도립 자세까지 나아간다. 자세들의 순서뿐만 아니라 매 자세를 취할 떄 시선의 방향과 호흡 횟수가 정해져 있고, 중간중간에 쉴 새 없이 연결 동작이 반복되어서 마치 불교의 108배와 같은 종교적 수행처럼 느껴지는 요가 수련이다.

경험상 선생님이 나름대로의 방향을 가지고 동작들을 이어 만든 시퀀스에 춤을 추듯이 접근하는 빈야사 수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도가 낮아 보이는 아쉬탕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매번 행하는 자세들과 순서도 똑같고, 연결 동작도 자세와 자세 사이마다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쉬탕가를 애정하는 입장에서, 이 수련이 좋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늘 같다는 것, 그리고 같은 것을 반복하는데 그게 매번 어렵고 힘들다는 것. 이 힘듦에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고된 육체의 수행을 통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그만큼 아쉬탕가는 체력적으로 고되다. 고백하자면 아쉬탕가 수련 10번 중 8번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오늘도 힘들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늘상 하던 건데도 항상 힘들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 긴장이 된다. 어차피 익숙한 흐름이라 집에서 홀로 수련해도 되는데 그 마음을 먹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1년 넘게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수련하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사바아사나 즉 송장자세를 새로이 경험한 것이다. 20년 넘게 안경잡이인 고도근시와 난시를 가진 나는 그날의 수련이 막바지에 다가감을 알리는 우르드바 다누라사나에서부터 안경을 벗는다. 먼저는 땀이 너무 많이 나서 후반부의 거꾸로 선 자세들에서 안경이 대롱대롱 매달려 오히려 거추장스럽기 때문이고, 그다음은 이미 자세들의 순서를 알고 있어서 굳이 앞을 정확히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다음 순서인 파스치모타나사나, 앉아서 몸을 포개어 이마와 정강이, 더 나아가면 배와 허벅지가 밀착하는 전굴자세에서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맨얼굴을 다리 위에 푹 파묻어버린다. 그렇게 내 몸을 내 몸에 기대어, 혹은 내 몸을 꽉 끌어안고서 이전 자세에서 깊게 뒤로 젖히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천천히 정리한다. 그리고 안경을 끼지 않은 채로 머리서기를 지나 마지막 빈야사, 그리고 사바아사나까지 간다.

몸의 모양만이 아니라 시선의 방향까지 맞추는 아쉬탕가 수련에서 진정으로 눈을 감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세가 사바아사나다. 눈을 감고 숨을 쉬는 동안, 잠깐 안내하는 선생님 목소리 외에는 조용한 음악이나 멀고 가까운 주변소리만 들린다. 편안하게 맞이하는 사바아사나는 매번 다르다. 움직임을 멈추자마자 온갖 사람과 일 걱정이 찾아든 때도 있었고, 그냥 끝까지 '참 힘들다'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내가 사바아사나의 맛을 본 건, 수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걱정을 안은 채 '이런 날엔 다칠 수도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혼자 다짐하며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수련에 임한 어느 날이었다.

적당히 하든 애쓰든 고되긴 마찬가지인 그 모든 자세를 지나 사바아사나에 다다랐다. 밤 9시가 넘어 어둑어둑한 수련실. 땀이 흥건한 매트에 등과 손등을 대고 누워 숨을 쉬는데, 뜨거운 안도감이 마치 바람처럼 가슴속에 밀려왔다. 숨을 쉴수록 차오르던 숨이 코끝으로 조용하지만 강하게 빠져나갔다. 힘들고 어려울 것이 뻔한 무언가를, 오늘 얼마나 잘했든 못했든, 중간에 약간 포기하기도 했을지라도, 끝까지 해냈다는 것. 그 안도감이 어찌나 컸던지 나는 송장이 된 채 호흡이 차오르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흔히 요가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한다. 어떤 요가원에서 수업을 듣더라도, 시작과 중간의 움직임은 약간씩 다르지만 마지막은 같다. 사바아사나. 앞선 수련이 평소보다 잘 되었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그날의 나와 그날의 수련이 만나 어떤 상태의 송장이 된다는 것. 이것이 요가가 만드는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다. 그리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 마지막 '나마스떼'로 인사할 떄, 땀에 절은 나는 오늘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련하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이미 이전의 나와 달라져 있다.



2023년 1월 『들』매거진 2호에 수록된 글을 일부 고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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