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두 명(마라탕과 콜라)

고통도 맛이야!

by Gourmet

내 옆자리 동료 Rain의 식성은 Pain(고통)이다.


내 바로 앞 번호이자 4년 동안의 짝꿍이자 연구실 옆자리인 Rain은 마론인형처럼 생겼다. 어릴 때부터 말랐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자신이 정한 일정 체중을 넘으면 무조건 감량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먹는 것에 큰 미련은 없다.

Rain의 하루 세끼를 관찰하면 아침은 늦게 일어나 거르고, 점심은 학교에서 3분 거리 자취방으로 돌아가 전날 알바로 미루어뒀던 잠으로 채우고, 저녁은 촉박한 알바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달린다. 어쩌다 밥을 챙겨 먹는 날이면 냉동볶음밥, 유부초밥, 다이어트 중이면 간장 뿌린 양배추 샐러드를 3일 내내 먹는다. 나도 여름을 맞아 하루 한 두 끼 먹는 것으로 감량하고 있지만, Rain의 식습관을 보면 화성인 X파일에 나가도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를 먹고 걸어 다니고 뛰어다닌다는 사실이 놀랍다. 심지어 정기검진에서도 멀쩡하다고, 이상 수치 하나 없이 매우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Rain이 유독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 고통의 음식, 콜라와 마라탕 이 두 가지를 좋아한다. 콜라는 자취방에 박스로 시켜 마시고, 배달음식을 시킬 때면 늘 콜라를 추가한다. Rain의 콜라 철학이 있는데, 제로콜라는 안된다고 했다. 인공감미료가 내는 독특한 밍밍한 단맛이 싫다나. 지금처럼 더운 날에는 조금 자제하기는 하지만 마라탕을 일주일에 3번은 꼭 먹는다. 마라탕 쿨타임이 하루보다 짧단다. 점심에는 쉬러 가 보기 힘들지만 다른 메뉴는 몰라도 마라탕을 먹으러 가자고 유혹하면 대부분 수락하는 Rain이다. 그래서 'R.또.마'는 별명까지 붙었다. 'Rain 또 마라탕'이라는 뜻이다. 마라탕은 4단계로 시켜서 나는 Rain에게 '파이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렇게 먹다가는 언젠가 실제로 불을 뿜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식욕이 없는 것처럼 사는 친구가 이렇게 한우물만 파는 음식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콜라는 짜릿한 기포가 식도에 달라붙어 파바팍 터지면서 내려가는 따가움이 좋고, 마라탕은 매운 것을 먹을 때 속이 10인용 계란볶음밥을 뒤집는 거 마냥 역류되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위장이 행주처럼 쥐어짜이는 느낌에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그렇다. Rain에게는 고통도 맛이었다.

콜라를 좋아하는 마음은 나도 백만 번 이해한다. 내가 3살쯤일 무렵 우리 가족은 미트파이와 파블로바의 나라 호주에 살았고, 아빠는 엄마로부터 콜라 금지령을 받았다. 아빠가 콜라를 마시면 내가 순간이해 옆을 지켰고 아빠는 어린 딸에게 콜라를 줄 수밖에 없었다. 콜라를 사랑하는 아빠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바로 내가 잠든 시간에 콜라를 마시는 것이었다. 모든 방의 불이 꺼진 사건이 일어난 그날도 아빠가 콜라를 냉장고에서 꺼내기까지 계획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콜라의 뚜껑을 열 때 그만 방심하고 만 것이다. 치익! 콜라는 요란한 소리를 냈고 어린 맹수는 깨어났다. 호주의 골리앗 메뚜기 마냥 뛰어온 나는 고양잇과의 노란 눈을 반짝이며 '코~~ 올~~ 라!'를 외쳤다고 한다. 새카만 칠흑 속 희미하게 흩어지는 냉장고 불빛 뒤편으로 번쩍인 두 개의 광원. 아빠 입장에서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가족들과 콜라를 마시면 이 일화로 놀림을 받는다.

마라탕은 한국인이 매운 것을 좋아하는 원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만 카스텔라, 벌꿀 아이스크림 등 한동안 유행한 음식들의 인기는 반짝하고 지는 별이었지만 마라탕의 인기는 식지를 않는다. 원래 뜨거운 음식이라 인기가 식지를 않는 건지... 하하 썰렁한 개그는 여기서 그만두겠다. 아무튼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워커홀릭인 한국인의 특성이 매운 것과 찰떡인 것 같다. 일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와 고통을 매운 음식이라는 더 큰 고통으로 덮는 것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원리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심지어 마라탕은 매운맛의 쓰린 고통에 더해 산초의 알싸함으로 상처에 파스를 것처럼 화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마라탕은 내면의 화를 다스리는 현대의 민간요법이 아닐까.

Rain의 콜라와 마라탕에 대한 애정은 고통을 음식으로 잊고자 함이 확실하다. 이렇게 추리하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Rain은 혼자 산다. 혼자 살면 아플 때가 서럽다는 걸 Rain을 보며 느꼈다. 코로나 학번의 마지막인 우리는 비교적 가벼운 증상이었는데 Rain에게만은 이 먼지 같은 바이러스가 지독했다. 총 세 번 감염됐는데, 물을 마시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했다.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물과 죽, 과일 통조림을 챙겨 문에 걸어놓을 때까지만 해도 연락이 잘 돼서 이렇게 아픈 줄은 꿈에도 몰랐다.

Rain은 알바몬이다. 1년 내내 사장님 사정이 아니면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서빙, 조리, 배달 일당백 아르바이트생이다. 오죽하면 졸업하고서도 매니저로 일해달라고 애원할 정도다. 시험 기간도 쳇바퀴 일상은 마찬가지다.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전 중간고사를 치러 정시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뭘 해도 성공할 정신력이다.

Rain은 아파도 힘들어도 티를 내는 법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일찍 독립한 탓인지, 4년 내내 오전은 학생회로 오후는 알바몬으로 다진 사회생활 때문인지 늘 포커페이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다이어리를 두 개 쓰면서 일정을 쪼개서 관리했고,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른지. 목이 칼칼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물병을 까주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이면 감사했다 고생했다는 인사말을 보내 인사할 타이밍을 알려줬다.

늘 강해 보이던 Rain이 괜찮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은 날이 있다.

이날도 배달음식에 콜라를 추가 시켜 마신 날이었다. 각자 반쯤 남아 금세 김이 빠져버린 콜라를 마시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Rain이 훌쩍이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친구의 눈물에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가 딸을 챙기는 카톡을 모아놓은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Rain이 매일 어머니와 카톡으로 이야기하는 걸 봐왔기에 어머니에 대해 각별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각별한 애정과 그동안의 고됨이 섞여 나온 눈물이라는 걸 옆자리의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픈 걸 싫어하는 겁쟁이인 나는 늘 몸을 사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속이 뒤집히는 고통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걸, 고통을 이겨내는 각자의 방법이 있다는 걸 Rain을 보며 배웠다. 저마다 어른이 되며 슬픔을 감추는 노하우가 생긴다는 것도.

오늘도 Rain은 마라탕 4단계를 시켰다. 나는 옆에서 물만 마신다. 치익, 콜라 뚜껑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전 02화밥친구 한 명(김치볶음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