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열두 명(도시락)

친애하는 나의 밥친구에게

by Gourmet

도시락도 락(Rock)이다. 아니, 도시락도 락(樂)이다.


밥친구에 대해 검색하면 '밥친구'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가 아닌 신조어로, 문자 그대로는 '함께 밥을 먹는 친구'를 의미한다. 더 넓게 보면 밥 먹는 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나 대상, 즉 좋은 콘텐츠나 매체를 지칭하는 신조어에 가까워 밥을 먹는 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그 무엇이라도 '밥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과 음식에 담긴 추억에 대해 서술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밥 먹을 때 가볍게 읽기 좋은 '밥친구'를 연재해 왔다. 오늘은 밥친구의 근본적인 의미인 '함께 밥을 먹는 친구'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나에게 밥친구는 길동이다. 이 별칭은 길동이를 아끼는 선배언니가 붙여준 별명으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저기 바쁘게 출몰하는 모습을 보고 '홍길동'에서 따왔다고 했다. 길동이는 겨울철을 나기 위해 식량을 모으는 개미처럼 열심히 산다. 학기 중에는 멘토링을 하며 재능기부를 하고, 방학 때에는 어학연수를 신청해 미국에 다녀왔다. 또 조별과제에서 팀장이 탈주하면 대신 팀장을 맡아 업무를 수습하기도 했다. 가끔 지칠법도 한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모습에 친구임에도 존경을 표하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는 길동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인 점심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길동이와 나는 점심에 도시락을 함께 먹는 '밥친구'다.

도시락은 시간도 돈도 아낄 수 있게 해준다. 전날 도시락을 간단히 싸두면 점심시간이면 붐비는 식당을 헤메지 않아도 되고, 날으는 새들과 친구할 기세로 치솟아 버린 물가에 손을 덜덜 떨며 카드를 긁을 일도 없다. 비교적 손질이 쉬운 채소 위주로 준비하면 건강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 전날 방울토마토, 오이, 양상추를 가볍게 세척해 썰어 바로 냉장고에 넣어두면 걱정이 없다. 피부가 좋아졌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데 이는 모두 도시락으로 식단을 바꾼 덕분이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뒤로 식비를 아끼기 위한 도시락이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집에 가고 나면 통학생인 길동이와 나만 남기 때문에 우리 둘은 자연스레 함께 도시락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길동이는 보통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주신다. 나와 달리 길동이의 통학시간은 왕복 2시간을 훌쩍 넘긴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씻고 자야 겨우 등교를 할 수 있다. 통학버스로 등교하는 학생들은 무조건 일찍 도착한다. 버스를 놓치면 달리 학교를 갈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나의 하루는 연보라색 도시락 가방을 달랑달랑 들고 오는 길동이와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길동이의 도시락 꽤나 크기가 큰편이라 마치 초등학교 들고 다녔던 실내화 주머니처럼 보이기도 해서 무척 귀엽다. 그렇게 등교를 한 후 각종 실험에 치이다 보면 시간은 빠르게 달려 12시가 된다. 그러면 우리만의 아지트에 모여 점심식사를 시작한다. 사실 아지트라고 해봤자 학과에 딸린 휴게실이지만.

귀찮음으로 한번에 5개의 도시락을 만들어 두기 때문에 나의 일주일 메뉴는 똑같다. 먹는 것을 좋아해 차라리 일주일 동안 돈을 모아서 주말에 맛집을 찾아가는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반면 길동이의 도시락은 더 다채롭다. 길동이의 도시락통은 스테인리스로 열면 '달칵'하는 금속 특유의 경쾌한 소리가 나는데 마치 오전 동안 고생했다고 도시락통이 의인화되어 윙크를 날려주는 것 같기도 해서 더 기분 좋은 식사를 하게 된다. 어떤 날은 베이컨이 들어간 김치볶음밥, 어떤 날은 파우치에 노란 배추를 가득 담고 불고기를 싸오기도 한다. 그리고 보온병에는 된장국, 무굿 등을 차례로 바꿔가며 꼭꼭 담아온다. 도시락의 묘미는 서로의 음식을 한입씩 챙겨주는데 있다. 유독 맛있게 나물이 무쳐졌다거나 제철이라 심지가 부드럽다고. 그러면 길동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내가 길동이에게 붙여준 별명은 래서팬더다. 장기자랑을 할 때 래서팬더 잠옷을 입고 춤을 춰서 이기도 하기만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래서팬더와 무척 닮았다. 길동이는 과일을 특히 좋아하는데, 후식으로 싸온 키위가 달콤하다며 손과 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고됨을 락스타 정신으로 이겨 낸다는 의미에서 나락도 락(Rock)이다, 도시락도 락(Rock)이다 등 락으로 끝나는 모든 명사를 Rock으로 승화시키는 드립이 유행했다. 나에겐 이렇게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요즘의 '삶의 낙'이다. 웃음은 전염력이 강하다고 했던가. 친구가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나면 또 오후의 반복되는 일과를 굴려낼 힘이 생긴다.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도시락으로 식사를 바꿔보기를 바란다. 물에 굴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메뉴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 내가 나를 챙긴다는 것은 자존감을 키우게 해준다. 또 도시락을 챙겨다니다 보면 마음에 맞는 친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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