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계절이 있다
"락스 온 더 락"
로맨스 만화를 읽으면 댓글에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유래한 '밈'답게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인 캐롤라이나 리퍼만큼의 맵기를 자랑하니 읽기 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기 바란다.
"락스 한잔 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저 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웨이터가 다시 물었다.
"락스 한잔 하시겠습니까?"
"늘 먹던 대로 주게. 아, 이번엔 황산 토핑도 올려주게나"
"선생께서는 연인들이 부러운 건가요, 아니면 때때로 지나간 것에 대해 미련이 남는 것인가요."
또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
둘 다 일세. 살다 보면 누구든 그 두 가지 다에 해당되기 마련이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는 살아가면서 연인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
그날따라 노을이 밝았다
그런 만큼 기분도 암울했다.
마지막 남은 락스를 들이붓고 나니 노을마저 지고 말았다.
여름이었다.
솔로인 것을 자조하는 표현인데, 손님이 시키는 메뉴에서 알 수 있듯이 장소가 칵테일바이다. 칵테일바에서 혼자인 외로움을 락스를 마시는 것으로 서술한 잔혹한 재치에 웃으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아닌데? 칵테일바는 오히려 혼자여야 행복할 수 있어.' 칵테일바의 매력은 다양한 시그니처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것에 더해 사장님과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데 있다. 맞다, 포인트는 사장님과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점이다. 드물지만 한산한 시간대가 찾아온다면 카페에서도 이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계절별로 혼자 가기 좋은 칵테일바와 카페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1. 봄
- 컵오브(Cup of)
미식가 지인에게 추천받은 곳으로 제철에 나는 재료들로 칵테일, 차, 디저트를 만들어 계절마다 메뉴가 바뀌는 칵테일바이다. 봄에는 재스민백호은침 인퓨징 진, 레몬머틀코디얼, 백호은침소다를 섞은 '봄바람', 딸기 인퓨징 진, 릴렛 블랑, 드라이 베르무트로 만든 '딸기 마티니', 진한 초록색의 '쑥푸딩'을 맛볼 수 있다.
그날은 빈티지 편집샵에서 쇼핑을 하고 시간이 붕 떠 오픈 직후에 방문했다. 가게에 전세를 낸 듯 손님은 나 혼자였고 사장님과 한 시간을 떠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사장님 두 분이서 운영하는데 디저트 메뉴를 개발하는 디렉터와 칵테일을 연구하는 바텐더로 나뉘었다. 내가 갔을 때는 디렉터님이 맞아주셨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다람쥐의 부드러운 꼬리를 닮은 밤색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 단아한 진주 귀걸이를 한 누가 봐도 메뉴 설계에 신뢰가 가는 모습이었다.
내 키에는 조금 높은 의자에 요령껏 착석하고 우선 봄바람에 쑥 푸딩을 시켰다. 봄바람은 씨앗을 반으로 가르면 나오는 핵을 닮은 노란빛에 이맘때 안경에 먼지를 끼게 하는 황사를 씻겨 내려가게 하는 개운한 맛이었다. 쑥푸딩은 올해에는 꼭 많이 먹고 사람이 되어보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이처럼 봄의 파노라마에서 자라는 생기와 설렘의 맛을 기가 막히게 추출하는 비법에 대해 사장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봄이 되면 어울리는 차를 한 잔 마시고 하천으로 나가 산책을 하면서 개나리, 벚꽃이 자아내는 화사함을 구경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거기서 찾아낸 계절의 한 페이지를 뽑아내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거듭하는 것이다. '영감은 걷는 것에서 나온다.'라고 말한 한강 작가와 같은 답을 주시는 사장님의 말에 수긍하자 이어서 메뉴를 만들게 된 히스토리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장미코디얼과 생크림, 소다가 들어간 칵테일은 장미향에 거품형이라 '로즈폼폼'. 와사비칵테일에 방어세비체를 먹다가 문득 떠올라 시소를 인퓨징한 진과 와사비를 섞은 '흰살생선'. 건과일, 견과류, 오렌지필 등 17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 리큐르와 디사론노, 네이키드 허니, 다우 10년 포트로 슈톨렌을 녹여낸 듯한 칵테일을 바위를 닮은 온더락 얼음 위에 붓는다 하여 지어진 '바위 위의 슈톨렌' 등등.
메뉴 이름에 대한 이유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미드나잇 파르페'였다. 무화과, 피스타치오가나슈크림, 라즈베리꿀리, 카시스청향우롱젤리, 무화과잎오일이 차곡차곡 쌓인 파르페 여름과 가을 사이의 시즌메뉴였다. 왜 '미드나잇'이 붙여졌는고 하니, 옆나라 일본에서는 술을 마신 뒤에 파르페를 먹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여러 칵테일바를 옮겨 다니며 홀로 1차, 2차, 3차... 를 하는 이들을 '호퍼(Hopper)', 즉 '메뚜기'로 칭한단다. 늦은 밤 고된 몸을 술로 씻어 내리고 당을 보충하니 '미드나잇 파르페.' 생각보다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우리가 초코에몽으로 해장을 하듯 일본의 젊은이들도 파르페로 해장을 한다는 점에서 이웃나라의 친근함이 느껴졌다. 들어가는 재료에서도 복잡함이 느껴지는데 손질의 폭풍을 느낀 뒤로 쑥푸딩처럼 비교적 간소한 절차로 만들 수 있는 디저트를 구상하신다는 반전도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만들어 내는 향기를 붙잡기 위해서는 이토록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었다. 계절의 모든 찰나를 디저트로 기록하고 최적의 비율을 한 컵에 담아내는 사장님의 모습에서 봄의 도전정신을 배울 수 있는 칵테일바 '컵오브(Cup of)'였다.
여름 시즈널 칵테일「여름정원」과 「에프리콧 플라워」.
2. 여름
- 더단디(cafe.thedandi)
기차역 주위에는 상점이 많아 놀러 온 김에 Dr.R 언니와 산책하다 발견한 가게다. 간판이 없는 대신 나와 있는 판넬에는 '무화과 타르트, 초당옥수수 푸딩, 럼레이즌 쿠키'라고 쓰여 있었다. 초당 옥수수? 최근 여름책들에서 초당옥수수 예찬론을 읽은 뒤여서 눈길이 갔다. 우리는 퇴근을 한 뒤 만났으므로 카페는 마감이 한창이었다. 빠르게 가게 사진만 찍어 다음을 기약했다.
양산을 써야만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태양빛이 이글하다 못해 우글거리는 날 도착한 카페에는 통창 유리 너머로 마스코트 고양이 '땅콩'이 먼저 갸웃하며 인사를 건넸다. 길고양이 출신으로 가게에 눌러앉았다는 땅콩이는 겁도 없는지 자리에 앉으면 가방에 달린 키링을 건드리며 놀기 바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옥수수 푸딩을 먹기 위해 갔는데 하필 그날은 옥수수 푸딩이 없다고 했다. 대신 망고패션후르츠 베린느가 준비되어 있었다. 베린느는 나에게 생소한 디저트였는데 유리컵에 차곡차곡 재료를 담으면 무엇이든 베린느가 된다고 한다.
과일가게 겸 카페여서 그런지 과일 디저트에서 유독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서부터 순서대로 패션후르츠 퓌레, 망고퓌레, 크림층, 망고 무스, 초콜릿 무스, 크런치 초콜릿 코인이 올라가 있었다. 폭이 좁고 기다란 스푼으로 바닥이 닿을 만큼 깊게 꼽아 한입에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고 사장님은 방법을 알려 주셨다. 지구가 지각, 맨틀, 외핵, 내핵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층을 한 번에 뚫어 혀에 올리면 그 새콤함에서 8월의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섬광이 눈동자를 관통해 혈관을 타고 흘러 심장을 뛰게 하는 태양의 맛. 아주 차갑지는 않지만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느낌과 열대과일의 신맛은 더위에 녹아버린 입맛에 물을 주듯 생기를 찾게 했다.
검은색 민소매에 감색 앞치마, 태양의 플레어처럼 곱실거리는 연갈색 파마머리를 한 사장님은 신맛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다음 디저트는 레몬고수케이크라고 하셨다. 서울 토박이로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연고도 없는 목포에 내려와 카페를 차렸다며 만족스러워하는 사장님의 상큼한 미소는 쿠키런의 조각레몬 소개글을 떠올리게 했다.
<조각레몬> 소개글
한 조각을 잃어 슬퍼하고 있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젤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좋아하는 쿠키에게 뽀뽀를 날릴 수도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잃게 되는 게 언제나 슬픈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각레몬은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고대하던 옥수수 푸딩을 먹을 수 있었다. 푸딩이라고 하면 캐러멜 소스에 탱글한 일본식 푸딩을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의 바나나 푸딩처럼 크림 제형의 푸딩이었다. 아몬드 크럼블 위에 바닐라빈을 잔뜩 넣은 초당옥수수 커스터드 크림에 마스카포네 크림이 올라가 있었다. 옥수수로 만든 과자는 몇 입 먹으면 사료를 씹는 것 같아 쉽게 질려하는 편인데, 초당옥수수로 만든 푸딩은 컵을 핥을 기세로 먹을 만큼 맛있었다. 초당 옥수수 커스터드 크림은 묵직하면서 부드러웠고 느끼하지 않았다. 밑에 깔린 아몬드 크럼블은 커스터드 크림의 수분을 머금어 촉촉했다. 두텁게 올라간 마스카포네 크림, 다른 가게에서 초당옥수수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을 때에도 느꼈지만 옥수수는 정말이지 치즈와 잘 어울리는 작물인 것 같다.
쇼케이스 안에는 메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디저트가 하나 있었다. 그날도 중간중간 과일을 사러 오는 손님을 제외하면 카페에는 나뿐이었고, 사장님은 나에게 배가 부른 지 물었다. 그러면서 이번에 새로 연구 중인 메뉴라고 포레누아 베린느를 내주셨다. 체리인서트, 화이트체리 무스, 다크초코 제누와즈, 가나슈 몽떼, 크루스티앙, 그리고 위에 체리 하나가 새침하게 올라가 있는 형태였다. 무스에 키르쉬를 잔뜩 넣었다고 하시더니 토핑으로 올라간 생체리에 버금가는 풍부한 체리향이 느껴졌다. 과거에는 씨앗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런 맛의 디저트를 먹을 수만 있다면 체리씨를 잔뜩 물물교환해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뿌리고 싶었다.
신맛과 고수를 사랑하며 컵 디저트를 만드는 사장님은 김초엽의 『행성어 서점』에 수록된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를 떠올리게 했다. 줄거리를 짧게 소개하면 주인공은 휴게소의 신비한 가게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외계에서 온 초미각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사장님은 외계에서 와 지구인과는 다른 미각을 가졌고,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자신도 지구인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게 된다. 그 음식은 바로 거품층이 여러 겹 쌓인 구름 푸딩이다. "그래도 가끔은 함께 공유할 맛이 필요할 거예요." 라며 주인공에게 디저트를 건네면서 둘의 기묘하고 다정한 만남이 마무리된다. 나도 손님이 없는 한산한 시각 거의 1시간을 유쾌한 사장님과 떠들며 공유의 맛을 느꼈다. 소설에 나온 가게 사장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꼭 이 카페의 사장님 같을 것이다.
자신만의 길로 걸어가도 된다고, 시작은 무섭지만 막상 가보면 별 것 아니라고, 태양이 우리를 매일 비추고 있다고 사장님은 투명한 컵 디저트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여름의 열정과 경쾌함을 느낄 수 있는 더단디(cafe.thedandi)였다.
3. 가을
- 누가(NUGA)
인터넷에서 칵테일바를 물색하다가 나온 사진에서 깔끔한 검은색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비 오는 날 가면 운치 있겠다는 생각에 일기예보만을 주야장천 보다가 비가 오는 날 가게가 있는 시내로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록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멎어 버렸지만 말이다.
낮에는 카페로 운영되고 밤에는 위스키바로 변신하는 곳이었다. 입구에는 '오늘은 NUGA 오시나 기다리는 중'이라며 사장님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귀가 반겨줬다. 비는 멈췄지만 빗방울이 맺혀 있는 창문만으로도 낭만은 충분하다고 위안을 삼으며, 수제 레몬 버터바와 한 달간 신상 이벤트 10% 내린 가격이라는 문구에 유혹을 받아 '클렌드로낙 오드 투' 3종을 주문했다.
레몬 버터바는 독특하게도 잘라먹을 수 있는 칼이 아니라 중식도의 축소판에 가까운 미니 도끼가 제공되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그런지 생각보다 단단해서 힘을 주어 잘라야 했다. 버터의 느끼함을 레몬의 산미가 감싸주어 고소함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바에 앉아 장식장에 진열된 병을 구경하는 동안 글렌캐런에 담긴 위스키가 나왔다. 메스실린더에서 30ml는 무척 적어 보였는데 글렌캐런에 담겨 있는 위스키 30ml는 되게 양이 많아 보였다. 카페를 한지는 10년, 위스키에 입문한 지는 4년이 되었다는 사장님은 위스키 무지렁이를 위해 간단한 위스키 종류 구분법과 마시는 방법을 소개했다. 위스키를 하이볼이 아닌 단독으로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설렘반 기대반으로 첫 입을 대었다. 영롱한 호박빛으로 캐러멜을 녹인 듯한 색깔과 달리 코가 찡하게 매웠다. 처음 먹는 음식도 3번을 먹으면 익숙해진다고 했던가. 3모금을 마시니 익숙해지며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오드 투 더 밸리'는 베리류, '오드 투 더 앰버스'는 훈연향, '오드 투 더 다크'는 초콜릿향이라고 하는데 초보인 내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오드 투 더 앰버스의 피트 향 정도였다. 가을의 비에 떨어지는 낙엽과 나무껍질을 술로 내린다면 이런 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도에 육박하는 위스키를 아~주 천천히 마시며 버터바를 비롯해 한창 유행했던 두바이초콜릿, 바스크치즈케이크, 바클라바 등의 디저트를 모두 사장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두바이 초콜릿은 우리 지역에서는 최초로 시도했는데 단골손님들 덕분에 즐거웠다고 하셨다. 여러 카페에서 두바이초콜릿을 기반으로 만든 디저트들을 잔뜩 사 와서 보부상처럼 늘어놓고는 사장님한테 먹이며 '당신, 다른 곳보다 잘 만들었어!'라며 기운을 북돋아줬단다. 이런 동물의 숲 주민들 같은 따뜻함이 있나. 막연히 누군가의 성취를 축해주는 마음은 순수하다. 또 바스크치즈 하면 생각나는 손님도 있다고 하셨다. 딱 바스크 치즈케이크 하나를 주문하더니 묵묵히 먹고 한 달 뒤에 와서 똑같이 먹고 돌아갔다고 했다. 이에 '우리 가게 바스크치즈케이크 맛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다음에 오면 바스크치즈케이크를 시키라고 추천을 해주셨다.
이제 쌀쌀한 가을에는 열을 올릴 수 있는 나무맛 위스키가 떠오른다.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을 쬐는 아기자기한 손님들이 모이는 카페이자 위스키바 누가(NUGA)였다.
4. 겨울
- 올로(OLO)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혼자서라도 연말 분위기를 내고 싶어 방문했다. 보통은 이름을 들어 본 메뉴를 시키지만 이번에는 매니저님과 주말 알바생 분에게 각각 추천을 받았다. 매니저님은 버터플라이피가 들어간 분홍색 김렛을, 알바님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주었다. 내 입맛에 더 맞는 것은 카타르시스였다.
나무위키는 카타르시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카타르시스.
럼 베이스 칵테일 중 하나. 괜히 지어진 이름이 아닌 것처럼 상당히 독한 쪽에 속하는 칵테일이다.
맛은 아마레토와 라임즙이 들어가 단맛과 신맛이 약간 나며 아주 독하다. 일단 오버프루프 럼이 들어가 도수가 높은데다 아마레토와 라임즙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도 않기 때문에 무척 독하므로 주량이 약한 사람이 막 마시다간 확 갈 수 있으므로 조심하며 마시는 것이 좋다.
도수는 제대로 만들었을 때 51.3°. 시중에 판매되는 칵테일 중에서는 거의 최상위권의 도수를 자랑하며, 파우스트와 비슷하거나 더 강력한 수준이다. 더블샷으로 두 잔 정도만 마셔도 어지간한 주당들조차 알딸딸해지니 조심히 마시자.
OLO의 카타르시스는 오렌지가 들어갔다. 아마레토의 살구씨향과 오렌지가 정말 잘어울린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살구씨로 만든 행인두부에 오렌지를 곁들여 먹는 실험도 해보았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노란색 탈색머리를 하나로 묶은 알바님은 내 또래에다 비슷한 전공이어서 대화가 잘 통했다. 고단한 실험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기억에 남는 손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루는 외국인 손님이 왔는데 나처럼 추천해주는 것으로 마시겠다고 해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 손님은 재주문을 3번 더 했다고. 카타르시스를 만들고 느끼는 카타르시스라니. 이렇게 라임이 맞는 행복이 또 있을까 싶다. 또 하루는 알바님이 쉬는 날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알바님이 만든 메뉴를 찾는 손님이 와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레시피를 물어보려는 전화였다고 했다. 칵테일은 사람의 손맛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고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해주는 알바님의 모습은 영화 속 주인장 같았다.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시그니처 메뉴가 생겨 있었다. 알바님의 이름을 건 칵테일도 있었다. 이름을 건 시그니처를 만들자는 안건이 나온 날부터 퇴근을 하고는 마트에 들려 이것저것 재료를 산 뒤 어떤 것들이 어울릴까 고민을 하다가 밀크티를 베이스로 해서 칵테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겉모습만 보면 스팀거품이 올라가 있어 따뜻할 것 같지만 차갑다. 한 입 마시자 마자 베스킨라빈스 민트초코우유가 그려졌다. 민트초코우유의 홍차맛 버전이랄까. 민트 대신 술이 화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 신기했다. 찻잎과 우유가 만나면 끝맛에 혀가 오그라드는 듯한 텁텁함이 느껴지는데, 술이 들어가니 이런 답답함이 해소되었다. 시그니처 메뉴 역시 원작자만이 만들 수 있어 알바님이 일하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보물같은 칵테일이었다. 슬픈 소식은 메뉴가 나온 한달 반 뒤에 알바님이 새 길을 찾아 떠난다는 것이었다. 오랜친구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 때문일까.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응원을 건네고 가게를 나왔다.
피부에 닿을 때는 손이 빨개지도록 차갑지만 녹으면 봄에 피어날 식물들에게 수분을 공급하는 새하얀 눈처럼, 이별과 새출발을 하는 마음을 배운 올로(OLO)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