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계 미국인 한 여인이 비자 상담을 위해 찾아왔다.
허리까지 땋은 머리가 문신으로 가득한 몸을 휘감듯
그녀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휘감겼다.
비자는 마치 지도를 펼쳐 목적지를 설정한 후
나아갈 방향을 찾아가는 인생의 설계도와 같다.
의뢰인과의 비자 상담은 때론 인생 상담이 되어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깊은 대화가 오고 간다.
마리는 과감한 외모와 달리 진지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그녀의 땋은 머리를 풀 듯 하나씩 지난날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녀는 약 20살 연상인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이혼한 적이 있다.
그녀의 미국인 남편도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이혼한 적이 있다.
각자 한국인으로부터 상처받았음에도 전 배우자 나라인 대한민국 땅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녀는 경제활동이 가능한 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 SOFA협정 A-3 배우자 동반비자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꼭 살고 싶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도.
한국에는 전남편 사이에 낳은 중학생 아들이 있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는 양육비를 지원해 주며 보살펴 주고 싶다고 했다.
면접교섭권이 있는 경우에는 경제활동이 가능한 비자(F-6) 발급이 가능했지만
전남편의 방해로 비자 자격이 상실된 것이다.
전남편은 필리핀에서 결혼하고 임신한 상태에서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온 후
3개월째부터 매일 술을 먹고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20대 초반 임산부였던 그녀는 발로 차이고 머리채를 잡혀도 한국어를 몰라 도움을 요청할 곳조차 없었다.
112에 신고해도 훈방 조치 되고, 얼마 안 가 도돌이표 되었던것 같다.
그녀는 결국 아이를 두고 도망쳐 나온 후에야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남편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낳은 후 안정을 찾았지만, 아직도 전남편의 횡포가 있어 괴롭다고 한다.
전남편은 아들과의 면접교섭권을 방해하면서도 양육비를 초과한 돈을 수시로 요구했다.
그녀에 대해 알아갈수록
불투명했던 내 마음의 셀로판지에도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 남편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공기보다 가벼워진 목소리는 파르르 떨려 흩어졌다.
눈빛은 칼라렌즈를 착용한 듯
분노, 공포, 슬픔, 후회의 감정에 따라 변해갔다 .
얌전하게 있던 3살짜리 아기도 무거워진 공기가 답답했는지 짜증을 내며 두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귀보다 더 큰 귀걸이를 한 남편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놀라 애꿎은 귀만 더 만져댔다.
그녀의 서툰 한국어를 한 줌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
노트북의 자판 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를 제압했다.
서로 기싸움하듯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에 집중했다.
의뢰인과 눈을 마주치는 일은 중요하다.
인종은 잊은채 한 사람의 눈만 보인다.
상대의 진심이 보이면 나의 가슴은 점점 뜨거워진다.
한국인에게 받은 상처를 한국인에 대한 신뢰로 회복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온몸에 새겨진 문신이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보였다.
애니메이션 케데헌(K-pop Demon Hunters) 악령의 흔적처럼 보이던 그것은 더 이상 어두운 의식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신념이 담긴 아름다운 문양처럼 느껴졌다.
체류자격 변경을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는 국민배우자 즉 전 남편에게 이혼의 귀책사유가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아들과 만남이 지속되어야 한다.
수사기관과 법원에 정보공개청구 및 기록열람등사를 시도했지만
보존기간 만료로 모두 폐기되어 공신력 있는 자료수집이 불가능했다.
언제나 마음은 뜨겁지만 현실은 냉랭한 법.
하지만 뜻에 따라 길이 만들어질 것을 안다.
흔들리던 눈빛 속에서 마리는 갑자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훈남의 야구선수가 멋진 포즈를 한 사진이었다.
잘생긴 데다 야구도 잘하여 인기가 높다며 환하게 웃는다.
분위기는 반전에 반전이 반복되었다.
아들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라며 전남편이 방해하여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양육권을 포기해야만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 깊은 사연을 아들에게 알리기에는 아직 어린것이다.
아들과 재회를 위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문자 발송 일시와 내용까지 알려주며 피드백하였고
그녀는 간절함과 성실한 마음으로 따라주었다.
허공 속에 떠돌던 엄마의 문자는 점점 주인을 찾아갔다.
“응”, “바빠” 아주 짧은 단어들이 시시때때로 올 때마다
그들 마음의 강에는 불안하지만 작은 디딤돌이 놓이기 시작하여 만남의 희망이 생겨났다.
듬성듬성 놓였던 징검다리는 어느새 하나의 다리가 되어 드디어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진 속에 담긴 모자의 짧은 만남은
그녀에게는 오작교 다리였고
나에게는 업무상 증거자료가 되었다.
한편 남편의 폭력성이 입증되어야 했다.
돌이 없으면 흙으로 성을 쌓듯이 직접 증거수집이 힘들어 신빙성 있는 정황증거를 수집했다.
아빠에게 맞은 아들의 영상자료, 친구들의 진술서,
그리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행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전남편의 문자.
식비가 많이 든다며 매일 아들의 음식 섭취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 기가 차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의견서를 작성했다.
행정법률가(Administrative attorney)로서 논리적이고
작가로서는 인간적 호소를 담아 차갑고도 따뜻한 문서를 만들었다.
완성된 의견서와 서류를 관할출입국사무소에 제출하고 법무부 심사를 기다렸다.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충북 제천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소나무로 숲을 이룬 오솔길을 걸었다.
그곳의 소나무는 평범하지 않았고, 푯말이 나란히 서 있었다.
독특한 외모를 가진 소나무는 내 시선을 휘감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역사의 상처를 간직한 곳’
상처 속에서도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라났고,
그 힘의 울림이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일제 강점기 송탄유를 채취하기 위해 소나무에 ‘V’ 자형 상처가 만들어졌지만,
그 상흔 위에도 새순이 돋고, 솔방울이 달리고, 꽃가루를 세상 밖으로 뿌려내었다.
소나무 상처의 흔적은
마치 폭력에서 회복한 마리의 문신처럼 보였다.
인간의 욕망은 눈물의 진액을 흘려보내고 남은 상처는
더 이상 흉이 아닌 아름다운 문양으로 승화되었다.
그녀의 문신도 폭력의 그림자처럼 거부감을 주었지만
아픔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표식 같았다.
3 개월 이라는 심사 기간 동안 그녀와 나는 위로와 인내로 더욱 친밀해졌다.
남편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인간적인 교감도 나누며 좋은 결과를 기다렸다.
그녀는 비자가 승인되면 아담한 호프집을 운영하는 작은 소망이 있고,
아들이 자립할 때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주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꼭 이루어지게 하고 싶었다.
법무부는 한 번 반려했으나
마리의 상황을 깊이 공감하고 있는 출입국사무소 담당자의 재검토 요청으로 최종 승인되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잘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별과 땅을 잇는 사제처럼 소명감의 싹이 내 마음속에서 한 뼘 더 자라났다.
마리로부터 수임을 받고 8개월 동안 고민하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고대하던 사업자 등록증이 나왔다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더 이상 에어리언이 아닌
나의 이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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