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리언이 되다 1

딸과 함께 하는 여행

by 열음

딸과 비행기를 타고 일본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나도 모르게 카디건을 벗어

팔에 걸쳤다.
비바람이 달라붙은 습한 공기.
머리카락이 뺨을 때리며 열기를 더했다.


얼마 전 수능을 마친 딸은
이국적인 풍경 앞에서 숨김없는

감탄을 터뜨렸다.
낯선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책임에서 잠시 벗어난 듯 보였다.


딸은 수능을 치르기 전부터
한 번의 기회를 더 바라고 있었다.
순리대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마친 뒤
결정을 잠시 유보해 두었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입시라는 문이 아이 앞에 놓였다.
그 문은 개선문이 아니라
넘어야 할 장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한 이후
아이에게는 학업보다 마음의 회복이 먼저였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친구와 방학 동안 다녀온

미국 여행은 아이를 조금 다른 얼굴로 돌아오게 했다.


한 달의 여행을 마친 아이는
꿈과 미소를 품은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 이후 아이는 학교생활을 묵묵히 버텨냈다.
나는 그 변화가 궁금했다.
여행이 가진 힘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더 달려야 하는 딸을 위해
그 마법 같은 힘을 다시 빌려보기로 했다.



성인이 되는 딸과 마시는 칵테일


해외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와 딸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삶의 여유 없이 지내온 나에게
여행은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한 일이었다.


아이의 열정은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나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아이의 알뜰함은 예상보다 철저했다.
택시는 선택지에 없었고,
버스조차 한 시간 이상 걸어야 할 때만 허락되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다 끝내 꺾여버린 우산.
우산을 하나 더 사자는 부탁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우리가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인지,
우산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여행 사흘째,
나는 면만 먹어가며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내 생일이 겹친 날이었다.


종일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저녁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메뉴로
생일을 기념해 주겠다는 딸의 말에
그날 하루를 버텼다.


연말에 맛집이 우리를 기다려줄 리 없었다.
결국 나는 편의점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0 라면을 사서 숙소에서

조용히 생일을 보냈다.



일주일 동안 숙소를 세 번 옮겼다.
같은 가격이었지만 등급 차이는 컸다.
가성비를 꼼꼼히 따진 딸의 선택이었다.

가주마루나무


두 번째 숙소로 옮기던 날,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이던 가주마루나무를

볼 때마다
문득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복통은 아침부터 이어졌고,
아무 생각 없이 신고 온 플랫슈즈 때문에

허리까지 삐끗했다.
딸은 학교 체험학습보고서 처리 문제로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결국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 같던 모녀 사이에
처음으로 큰 충돌이 생겼다.
딸은 나를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키나와에 도착한 순간부터
보호자는 딸이 되었고
나는 그저 따라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고아가 된 기분을 느꼈다.

심신의 피로와 언어의 장벽,
알 수 없는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서러웠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 순간
한국에서 만났던 외국인 의뢰인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들의 서툰 언어 속에서
나는 무엇을 들었고
얼마나 이해하려 했을까.


그리고 딸의 지난 시간이 겹쳐졌다.
경계에 머무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학교에서 친구들이 무서웠다고 말하던 아이.
딸에게 잠시 버려진 나.
체류 자격 앞에서 늘 불안해하던 사람들.


우리는 정체성을 잃을 때
삶의 중심을 잃는다.


다행히 아이는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내 손에 소화제를 쥐여주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평소 약을 잘 먹지 않는 나였지만
그날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약을 삼켰다.
딸이 내민 그 손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보호자와 외국인,
부모와 아이는
언제든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엄마와 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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