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쪽지 한 장
눈에 익은 부스러기 같은 물건들이 보인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버리지 못해 남겨진 것들이다.
아침 출근길에는 손이 가지 않던 옷이
어느 순간 시야에 포착되는 순간이 있다.
옷을 처음 샀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걸쳐본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장면이
문득 과거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 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기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이불뿐이었다.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바둥거려 보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천둥 번개보다 더 크고 아찔했다.
“일어나서 씻고, 학교 가야지.”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까지 이불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불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차라리 맞는 쪽이 나아 이불로 김밥처럼 몸을 단단히 말아본다.
엄마가 회초리를 찾는 동안
작은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친다.
무엇으로, 몇 대나 맞을까.
그날 간택된 회초리는 파리채였다.
이불에 내 몸을 짱짱하게 말아보았지만
이빨 빠진 칼날에 너덜너덜 터져가는 김밥처럼
이불은 사라져 버리고 결국 가녀린 내 몸만 남겨졌다.
이상하게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파리채가 찰싹거릴 때마다
마음속 고통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지쳤는지, 파리채를 내동댕이쳤다.
또 하나의 의식이 끝났다.
엄마는 평소와 다른 톤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니?”
매를 맞을 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 한마디에 쏟아졌다.
“학교 가기 싫어요.”
엄마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더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던 거야?”
“짝꿍이 너무 괴롭혀요.”
짝꿍은 부자 집 외동딸이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와 몇몇 아이들을 불러
선생님 책상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에게 그곳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역이었다.
점심시간, 그들의 대화는 늘 또렷하게 들려왔다.
특히, 짝꿍의 목소리는 가장 크게 들렸다.
“선생님, 우리 엄마가 선생님 운동화 사드린대요.”
짝꿍은 나를 때리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등교하자마자 책상 위에 선을 그었다.
선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짝꿍의 눈빛은 날카로운 레이저로 바뀌었다.
차라리 한 대를 때려주면
나도 꿈틀거릴 명분이 있었을 텐데.
짝꿍은 적당한 응징으로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선명한 경계선은 내 영혼을 교실 밖으로 밀어냈다.
짝꿍과 선생님의 단단한 유대는
엄마는 장애가 있는 언니를 나보다 더 보호해야 했다.
나는 늘 아픈 손가락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날만큼은 엄마에게 나도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종이와 펜을 꺼내 조용히 글을 적었다.
‘ 00 엄마다. 00이 괴롭히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란다.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다.’
짧은 두 문장이 적힌 작은 쪽지 한 장.
세상에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느꼈던 교실과 책상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학교까지 3킬로미터를 마음의 축지법으로 단숨에 걸었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또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쪽지를 건넸다.
짝꿍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짝꿍이 쪽지를 펼쳤다.
숨결이 느껴졌다. 숨은 점점 작아졌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짝꿍의 낯선 눈빛을 보았다.
‘아, 이 아이도 나처럼 작은 아이구나.’
그는 지우개로 선을 힘껏 지웠다.
경계의 선이 무너졌다
호흡을 멈추게 하던 경계의 선은
이제는 그저 낙서에 불과했다.
난 서류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서류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제도 앞에서는 종종 에어리언이 된다.
그 제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서류이다.
자격과 비자격,
가능과 불가능,
허용과 배제의 선을 차갑게 긋는다.
서류는 억울한 사정과 설명하지 못한 고통을
문장으로 옮겨주고,
외부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안전지대로 데려온다.
교실 밖에 있던 초등학교 2학년의 나를
책상으로 다시 불러낸 것은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또렷하고 정성껏
글을 적어 내려갔던 엄마처럼
나는 오늘도